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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남자 류해국, 센 장소에 던져졌다”

영화화된 만화 <이끼> 그린 윤태호가 말하는 영화와 원작 사이의 같고도 다른 숨결
등록 2010-07-07 16:30 수정 2020-05-03 04:26
〈이끼〉그린 윤태호 작가.

〈이끼〉그린 윤태호 작가.

“어땠어요?” 앉자마자 재게 묻는다. 윤태호 작가는 기자 시사회 개최 소식을 듣고 많이 설레었다고 한다. “드디어.” 는 영화화된 윤태호 작가의 첫 작품이다. (1998)는 판권 계약은 맺었지만 진행은 느리다. 2007년 만화 웹진 ‘만끽’에서 연재를 시작한 는 스스로를 ‘마이너’라고 생각하던 윤태호 작가를 ‘대한민국 대표작가’로 우뚝 세웠다. 는 3600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만화 는 본격 스릴러다.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시골로 내려온다. 한밤중 억수 같은 비를 뚫고 도착한 곳은 수상쩍다. 67살 아버지의 사인을 마을 사람들은 노환이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여러 번 그가 언제 서울로 돌아가느냐고 묻는다. 천용덕 이장을 비롯해 마을의 거주자들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린 이가 없다. 류해국은 집요한 남자다. 가벼운 시비의 가해자로 둔갑한 것이 억울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무죄를 인정받고 연루된 검사를 좌천시켰다. 결백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직장에서도 잘리고 아내와도 헤어졌다. 서울로 다시 올라갈 일이 없고 집요함도 멈출 수가 없다. 그는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죽음을 파헤친다.

사소한 사실을 단서로 사건의 논리적 정합성을 재구성하는 ‘집요함’은 스릴러물에서 ‘형사’ 역할로는 딱이다. 하지만 집요함을 일반인이 지닐 때 생활은 그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한다. 마을 사람들의 충격적인 과거를 밝혀내고 이장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그는 자신이 불행을 야기한 것은 아닐까라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윤태호 작가는 이 만화를 “아버지의 패배한 큰 싸움을, 사소한 싸움의 승리자가 승리로 바꾸는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이 싸움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기억해내고, 싸움의 끝에서 ‘회의 없는 무죄’라는 햇살을 만끽한다.

영화 〈이끼〉 포스터.

영화 〈이끼〉 포스터.

-영화화된 작품을 보는 소감이 어떤가.

=놀라운 속도로 영화가 완성됐다. 강우석 감독의 추진력이 대단하다. 가편집본을 두 번 보았다. 맨 처음에 볼 때는 내가 쓴 대사가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는데,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세트가 나오고 장치가 보이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공을 들였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떤 기사에는 내가 울었다고 나오던데 그건 아니고. 두 번째 영화 볼 때는 ‘이건 영화지’ 하는 객관성을 회복했다. 류해국(박해일)과 천용덕 이장(정진영)의 목소리가 내가 그리면서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는 걸 감지하면서, 감독의 의도를 따라가보았다. 캐릭터가 바뀌기도 하고 스타일도 좀 바뀌었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김덕천은 만화에서 모자라면서 어두운 인물인데, 영화에서는 코믹한 인물로 바뀌었다. 그걸 잘 소화해줘서, 덕천의 연기가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섬찟했다. ‘긴 원작을 쳐내면서 고민 많이 했겠구나’를 느꼈다.

-영화와 만화의 ‘기질’이 다르다. 만화가 선과 악의 경계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데 비해, 영화는 선악의 경계가 분명하다.

=만화는 문장화가 가능하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문장을 그렇게 의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화되면, 배우의 입에서 말이 되어 나오면 고정된다. 만약 나라도 소설을 만화화하게 되면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다. 심상의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감독 입장에서는 모호하게 헤매지 않고 한 가지로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회의가 많은 성격이다. 그간의 만화가 대중적이지 못했던 것도 이런 성격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갈팡질팡했다. 연재 중 18개 영화사에서 만화화를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전개할 예정인가에 대해) 다 다른 트리트먼트를 보냈을 정도다. 강우석 감독은 생각하는 전부를 쏟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화로는 얼마나 힘들지 모른 채 아버지 이야기를 넣으며 이야기가 번져갔다. 연재도 연장됐다. 나는 영화에 골라 넣을 수 있도록 간다는 생각이었는데, 감독은 스토리를 솎아내는 데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라. 솎아내서 영화는 일목요연해졌다.

-는 어떻게 시작됐나.

=맨 처음 연재한 ‘만끽’에서 센 거 하나 하자고 하더라. 퍼뜩 영상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덕천이 찾아가는 장면과 전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중 무의식 속에 눈으로 본 것이 각인되는 창고 신. 그리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던 ‘집요한’ 인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맞닥뜨려서도 슬퍼하기보다는 의심하는 인물을 이 속에 던져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재 3분의 1 지점에서 영화화가 결정됐는데 이것이 스토리에 영향을 미쳤나. 중간 지점 이후 내면의 갈등이 잦아드는 면이 있다.

=결말로 가게 되면 돋보기가 빛을 모으듯 스토리가 모아진다. 너무 많은 레이어를 깔면 혼란스럽다. 본래 생각보다 쉬운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화화와는 별개로. 이영지 캐릭터도 그렇고 끝까지 고민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인터넷 만화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종이 만화와 인터넷 만화의 문법이 많이 다르다.

=파란닷컴에 을 연재하면서 대본을 인터넷으로 성공을 거둔 몇몇 작가에게 보여주었다. 다들 고개를 흔들더라. “형 이건 아니에요.” 연재가 힘들어서, 2주에 한 번인 원고를 일주일에 한 번,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올렸다. 격월간, 계간으로도 올리니까 댓글이 살벌했다. 그러다가 한 달에 두 번 올린 적이 있는데 독자들이 놀라더라. 두 번째 를 연재할 때는 인터넷 만화 문법을 좀 알 것 같더라.

-어떤 것인가.

=인터넷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아주 게으르다. 마우스를 잡고 아래로 내리는 일만 한다. 위에서 아래로 진행돼야 한다. 나란히 두 컷을 배치하는, 시선을 옆으로 빼앗기게 그리면 안 된다. 인터넷 만화는 스크롤의 예술이다. 대사도 그 속도에 맞춰서 집어넣는다. 감정도 스크롤 속도로 조절한다. 이렇게 인터넷 만화는 영화와 비슷하다. 스크롤 속도에 맞춰 잔상 효과가 생긴다. 그리고 컷 비율이 영화와 비슷하다.

-미국에서 한국에 오랜만에 귀국한 이가, 인터넷으로만 한국을 접해보니 한국에서 모든 싸움은 만화가가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 후기에도 촛불집회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만화가들이 서러움을 유전적으로 타고나서인 것 같다. 1980년대 어린이대공원 만화 화형식에서 최근의 청소년보호법 사태까지 만화가는 사회에서 가장 약자다. 그리고 만화가가 워낙 대중친화적이다 보니 대중이 요구하는 것에 자석처럼 훅 걸리는 것 같다.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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