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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비가 오듯 후두둑, 시작됐다

개인적·심리적 사건 통해 파시즘의 기원 탐구한 200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하얀 리본>
등록 2010-06-30 22:28 수정 2020-05-03 04:26
영화 〈하얀 리본〉

영화 〈하얀 리본〉

은 20세기 초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기원을 탐구하는 영화다. 흔히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기원을 논한다고 하면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리라 예상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건 의사의 낙마, 소작인 처의 사고사, 남작 아들이 당한 폭행, 영지의 화재, 장애아가 입은 상해 등이다. 그 흔한 유대인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사건들이 세계대전이나 파시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영화는 알레고리를 통해 전쟁이라는 사건의 작동 방식과 파시즘적 주체의 형성을 보여준다.

확실한 건 ‘사건 구름의 밀도’뿐

흔히 ‘전운(戰雲)이 감돈다’는 말을 한다. 왜 하필 ‘구름’(雲)일까? 이는 양자역학에서 ‘전자구름’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용법이다. 고정된 실체로 말할 수 없고, 출몰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분포하는 존재를 이르는 말이다. 은 이렇듯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감지되는 시대의 공기를 담는다. 그런데 지극히 시각 중심적인 영화매체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공기를 담는단 말인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밀도 높은 추리극을 보여주면서, 보여준 것 이면의 다 알지 못하는 사건의 배후를 어둠 속에 둠으로써 의혹과 긴장을 느끼게 한다. 퍼즐 조각이 모자라거나 남는 것을 보여주거나, 카드놀이의 마지막 패를 까 보이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잘 모른다는 건 확실하게’ 알게 한다. 이게 무슨 언어유희냐고? 그렇지 않다. 모든 사건은 명쾌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처럼 크고 중요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천안함 사건을 아무리 뜯어봐도, 구체적인 사항들이 들어맞지 않는다. 파면 팔수록 미궁에 빠져든다. 일부의 퍼즐은 무시하고 각자의 믿음대로 그림을 맞추며,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감지할 뿐이다.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각각의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연관되는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확실한 것은 사건 간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 사건들을 품은 공기의 질감, 즉 ‘사건 구름의 밀도’다.

영화는 사건들을 품고 있는 마을의 적대를 촘촘히 보여준다. 소작인은 아내가 죽지만, 땅을 떼일까봐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한다. 울분을 표하는 아들을 때릴 뿐이다. 의사는 내연관계에 있는 산파에게 지독한 모욕을 가한다. 의사의 딸은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도 어린 동생을 안심시키려 눈물을 삭인다. 목사는 아이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강제하며, ‘하얀 리본’을 통해 금기를 내면화하려 한다. 목사 아들은 외나무다리에서 목숨을 시험하고, 딸은 아버지의 새를 죽여 복수한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남작 아들을 물에 빠뜨리고, 때때로 몰려다니거나 일렬로 다닌다. 산파의 장애아가 린치당할 것을 예견한 관리인의 딸은 단지 꿈을 꾼 것일까? 아이들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걸 감지한 선생이 추리에 나서지만, 목사의 으름장에 부딪혀 그만둔다. 그토록 격분하는 목사는 단지 아이들의 순수를 믿어서일까, 아니면 선생 이전에 뭔가를 더 알았기 때문일까? 영화는 의혹을 해소하지 않고, 사라예보 사건에 이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알리며, 마을 사람들이 소문으로 사건을 마무리짓고 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으로 끝맺는다.

혹자는 벌여놓은 의혹을 해소치 않고 거대한 외부 사건을 끌어들여 무책임하게 결말지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가 바로 ‘모호함이라는 현실성’이다. 현실의 사건들은 언제나 모호하게 남으며, 19세기 탐정극처럼 한 명의 탐정이 모든 퍼즐을 맞추고 진실을 규명하는 건 ‘불가능한 환상’이다. 탐정 역시 사건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사건 역시 외부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영향받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찰자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건과 외부 세계의 알레고리적 관계를 암시한다. 사라예보 사건은 제국주의라는 적대가 자욱한 세계에서 한 발의 우연적 총성이 세계대전이라는 필연적 참화에 불을 당긴 사건이다. 영화가 농밀하게 그린 마을 사람들의 적대와 그 사이에서 출몰하는 사건들은 폭력의 기운이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화하는 순간의 모습이다.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치면 우두둑 비가 오듯, 전쟁과 파시즘은 그렇게 발화한다.

체화된 적대, 파시즘의 주체가 된 아이들

전쟁과 파시즘에서 가해자는 특정 개인이 아니다. 따라서 누가 행위의 주체인지를 가리는 것은 부차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의사와 산파에게 모든 혐의를 넘기고 잊어버리지만, 영화는 아이들이라는 집단적 주체의 형성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다. 소작인, 남작, 관리인, 목사, 의사, 산파의 집에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어른들 사이의 적대를 보고 느끼며 체화한다. 또 자신들끼리 교류하며 일을 도모하고 그들만의 교감을 쌓아간다. 그들의 보복은 의사나 남작 아들 같은 강자를 향하기도 하고, 장애아처럼 약자를 향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불의한 세상에 불의한 방식으로 복수한다. 이들이 바로 파시즘적 주체가 된다. 20년 뒤 패전국민으로서의 모멸감과 경제난에 짓눌린 이들이 자발적으로 파시즘을 선택한 건 동일한 사회심리학적 기전이 작용한 결과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에서 형으로 입양된 알제리 소년을 모함해 쫓아낸 프랑스 소년이 수십 년 뒤 지식인으로 성장하지만, 자신의 죄의식이 환기되는 순간 타자에 대한 의심과 공포로 신경쇠약에 빠지고, 알제리인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코자 그의 눈앞에서 죽어버리는 서사를 통해, 제국주의와 테러리즘을 유비해 보여준 바 있다. 가장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사건을 다루는 듯하면서, 현대정치사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드러내는 하네케 감독이 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억압과 분노와 폭력과 무기력에 찌든 우리 사회의 아이들이 20년 뒤 어떤 역사적 주체가 될 것인가? 섬뜩한 질문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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