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랩은 완전히 다른 분야다. 축구와 야구 둘 다 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에서 프로선수급 실력을 갖추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노래와 랩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는 가수 중 둘 다 수준급 이상으로 하는 이를 들라면 바비 킴 정도 되려나?
1집의 래퍼에서 2집의 싱어로
저 멀리 영국에서 걸물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두 번째 계획을 뜻하는 ‘플랜B’. 최근 국내 라이선스로도 발매된 그의 2집 앨범 (The Defamation of Strickland Banks)를 들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진부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노래와 랩 둘 다 어찌 이리 잘할 수 있단 말이더냐!
런던 태생의 27살 백인 청년 벤저민 폴 밸런스 드루가 플랜B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표한 건 2006년이었다. (Who Needs Actions When You Got Words)에서 그는 섹스, 마약, 살인 따위의 적나라한 길거리 이야기와 영국의 어두운 현실을 거친 랩으로 쏟아냈다. 노래도 불렀지만 랩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작곡은 물론 기타도 직접 연주했지만 래퍼로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평단의 호평 속에 데뷔작은 UK 앨범 차트 30위까지 올랐다.
4년 만에 발표한 2집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놀랐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맨 처음 나오는 (Love Goes Down)부터 1960년대 모타운 음악을 연상시키는 솔(soul) 곡이다. 애초부터 래퍼와는 거리가 먼 솔 가수였던 것처럼 진성과 가성을 넘나들며 미성을 한껏 뽐낸다. 앨범의 세 번째 곡이자 첫 번째 싱글로 커트된 (Stay Too Long)에 와서야 예전의 그 플랜B임을 확신하게 된다. 비교적 얌전(?)하게 노래하다 중반 이후 폭발적인 랩으로 반전하는데,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가 오버랩된다. 두 번째 싱글이자 최대 히트곡인 (She Said)에서 노래 중간에 잔잔한 랩이 나오는 대목을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듣는다면 다른 래퍼가 피처링을 했다고 여길 게 틀림없다. 래퍼에서 싱어로의 변신을 선포한 2집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비웃듯 UK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플랜B 2집은 콘셉트 앨범이다. ‘스트릭랜드 뱅크스의 중상모략’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스트릭랜드 뱅크스라는 가상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담았다. 솔 가수 스트릭랜드는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흥에 취해 묘령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다. 알고 보니 스토커였던 여인은 자신의 순정을 거부한 스트릭랜드에게 성폭행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감옥에 들어간 스트릭랜드는 자신을 공격해오는 다른 죄수에게 저항하다가 그만 그를 죽여버리게 된다. 앨범 맨 마지막 곡에서 스트릭랜드는 새로운 증거물을 갖고 다시 법정에 선다. 플랜B는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친다. 그가 누명을 벗고 풀려났는지, 아니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는지는 듣는 이의 상상에 달렸다.
영화 감독과 배우로 변신도플랜B는 이 앨범과 같은 제목의 단편영화도 제작 중이다. 감독과 주연을 직접 맡았다. 그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마이클 케인이 주연한 2009년 영화 에서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 불량 청소년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배우로서는 벤 드루라는 이름을 쓴다. 그는 올해 6개의 이야기가 얽힌, 힙합을 바탕으로 한 영화 (Ill Manners)로 장편 감독 데뷔를 할 예정이다.
연기와 연출까지 넘나들며 스토리텔링에 탁월한 감각을 보이는 플랜B. “에미넴과 마빈 게이가 만났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플랜B. 다음번엔 록이나 레게 같은 음악에 도전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플랜B. 그가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확실한 건, 미래의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생장해나가는 순간을 우린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정민 기자 한겨레 스페셜 콘텐츠부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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