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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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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안전한 임상수의 괴물들

영화 <하녀>의 단 두 가지 감정은 경멸과 조롱…
특정 계급의 인간적 공허함이 집안에만 머무니 다행이지 않은가
등록 2010-05-13 15:11 수정 2020-05-03 04:26
영화 〈하녀〉

영화 〈하녀〉

지금 와서 김기영 감독의 를 리메이크한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의 리메이크는 지나칠 정도로 많다(그것도 모두 김기영 자신의 것들이다). 그리고 ‘하녀’라는 제목이 2010년의 한국 현실과 어울리기는 하는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하녀’로 불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정부를 거쳐 이제 입주도우미라 불린다. 이름만 바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이름의 차는 상당히 크다.

원작의 ‘감정이입’을 모조리 끊어버리다

아마, 임상수도 김기영 원작을 리메이크할 계획을 세우면서 제목과 시대의 간격에 대해 생각해봤을 것이다. 2010년에 누군가가 ‘하녀’라고 불릴 만한 직업에 종사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원작처럼 간신히 이층집을 마련한 음악 교사의 집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영향 속에서 급속히 증가한 ‘슈퍼리치’(부자 중의 부자)들의 집은 어떨까. 물론 그들의 집에 들어가는 ‘하녀’ 역시 이전처럼 시골에서 돈 벌려고 상경한 시골 처녀들 중 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시 같은 사회 환경에서 중산계급의 끝자락에 서 있다가 몰락한 여자를 한 명 잡아서 이들이 하녀 코스프레를 할 수 있도록 끌어오자. 자, 이제 라는 제목은 정당화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사실주의와 결별한다. 김기영의 를 사실주의 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영화의 배경과 그 배경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1950년대 말 한국 사회를 살아갔던 보통 관객에게는 모두 익숙했다. 관객은 그들의 욕망을 이해했고 공유했다. 하지만 임상수는 영화를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딱 잘라내 사회적으로 분리된 섬으로 만든다. 아마 대한민국 끄트머리 어딘가에는 정말 저렇게 한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관객이 그들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임상수는 김기영 원작에서 가져온 사람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면서 원작에서는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당당히 영화 중간에 자리잡고 앉아 드라마의 엔진이 되었던 감정이입의 가능성을 모조리 끊어버린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살아 숨 쉬는 사람 대신 동물원이나 행동심리학자의 연구실에 갇힌 실험용 동물을 구경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되는데, 그것은 착각이 아니다.

임상수가 리메이크에서 보여주려던 감정은 단 두 개의 단어로 요약된다. 그것은 경멸과 조롱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하녀 은이의 고용주들은 오로지 경멸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 존재한다. 표면상 경멸당하고 모욕당하는 건 하녀 은이지만, 그건 상관없다. 영화가 그리는 그 과정 자체가 관객의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조롱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현실에서 격리된 계급 구조의 산물로, 그를 떠나서는 생각, 아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 좁디좁은 영역에서 제한된 경험만 하고 살아오다 보니 온전한 인간이 가져야 할 감정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치졸하고 유치하며 놀라울 정도로 상상력과 감정이입의 능력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 정서적으로 그들은 모두 장애인이다.

하녀 은이, 그 정도는 책임져야지 않겠나

영화가 호사스럽게 표현하는 그들의 세계 역시 내재적인 기형성을 담고 있다. 얼핏 그들은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의 화집을 감상하고 베토벤을 연주하며 분명 몇억원은 넘어갈 홈시어터로 조르다노의 오페라를 듣는다. 이 모든 것은 부러워해 마땅할 것들이나, 정작 그들은 그 환경에서 문화적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이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방으로만 존재한다. 영화 촬영 도중 피아노 치는 흉내만 내고 사운드 없는 세트에서 음악 듣는 척만 하고 있었을 배우들을 생각하면 이 모방은 더욱더 공허하게 보인다. 그 결과 베토벤과 조르다노를 감상하고 로버트 인디애나의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는 이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기껏해야 아침 일일연속극이나 궁중사극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이것은 캐리커처이고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억지 풍자인가? 정상적인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런 인간적 공허함이 특정 계급에서 예상외로 보편적이며, 이들이 세상을 주도할 때 이런 감정이입 불능의 기형성이 우리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직접 보아왔다. 그들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에게 가하는 폐해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임상수의 괴물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존재이다. 그들은, 적어도 여자들은 자신의 호사스러운 집 안에 머물러 궁중사극 놀이를 하느라 집 밖의 사람들은 건드리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들의 먹이가 되어, 원작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반항을 하고 사라지는 은이는 딱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시중을 들어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들어온 잘못의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지 않겠는가.

듀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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