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겐 팬덤이 있다. 이제 마흔을 넘긴 ‘오빠’지만 이놈의 ‘인기’는 끊이지 않아서, 여전히 3700명이 넘는 팬클럽 회원이 “동지섣달 꽃 본 듯이” 그를 따른다. 그의 홈페이지엔 “아무리 봐도 빅뱅의 승리랑 너무 닮았어요”라는 ‘콩깍지’ 씐 팬의 글도 있다. 28살이던 1996년 1집 를 발표한 이후에 김용우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젊은 소리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국악 대중화 혹은 현대화가 화두이던 1980~90년대 청춘을 보낸 소리꾼은 데뷔 이래로 전통과 현대를 잇는 소리의 다리를 놓기 위해 애썼다. 아카펠라 그룹 ‘더 솔리스트’의 화음에 맞춰 을 불렀고, 이정식 재즈 쿼텟의 반주로 도 녹음했다. 나아가 테크노 DJ의 리듬에 맞춰 노래도 불렀다.
무대의 흥을 녹음할 순 없을까그는 “하나의 작업을 하고 나면 다음엔 이렇게 해볼까 생각이 나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복받은 사람”으로 살다 보니 어느새 7장의 음반이 쌓였다. 그리고 3년 만인 2009년 말, 여덟 번째 음반 를 냈다. 여기엔 단출하게 4곡이 담겼지만, 4곡이 서로 넘나들며 하나의 희로애락을 이룬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피아노가 살랑대는 에는 생의 처연한 기쁨(喜), 해금의 서러움이 넘실대는 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서러움(怒), 으로도 불리는 에는 넘치지 않은 슬픔(哀), ‘구아리랑’부터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을 거쳐 ‘신아리랑’으로 이어지는 에는 굽이굽이 오르고 내리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춤춘다.
오랜만에 내는 음반에 들어갈 곡을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는 “평소 무대에서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번엔 무대에서 부르던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는 것처럼 녹음했다. 간단히 그는 “조미료 치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르는 자신도 듣는 사람도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는 바람과 흥으로 녹음실에서 라이브를 시도했다. 그는 “무대에서 부르면 나도 관객도 신명이 나고 기분이 좋은데 왜 녹음이나 방송에선 그런 흥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이번엔 반주도 (연주자들이) 한번에 들어가서 녹음하고, 노래도 되도록 한번에 부르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개 음반 작업은 떨어진 음정은 올리는 등 예쁘게 포장하는 작업을 거치지만, 이번에 그는 “대세에 지장이 없으면 그대로 가자”고 결심했다. 메트로놈에 맞춰서 녹음하는 작업의 유혹도 잊었다. 그는 “메트로놈의 기계적 박자에 맞춰서 녹음하면 우리 음악의 인간적인 느낌이 사라진다”며 “아무리 (기계로) 거르고 걸러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전했다.
애이불비, 아니 애이불비 너머역시나 실험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민요의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우리 장단을 갉아먹는” 방식을 버리고 나니, 노래로 반주와 호흡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특히 호흡이 길어 템포를 맞추기 어려운 의 ‘구아리랑’은 “발병이 날 정도로” 불렀다. 100번을 넘게 불러서 미치겠다 싶은 순간에 간신히 ‘그분’이 오셨다. 그래도 이렇게 남다른 실험이 가능한 이유는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음반 전곡의 편곡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권오준씨는 벌써 함께 작업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 음악적 동반자다.
이번 음반을 내려고 결심한 첫 이유를 꼽으라면 “을 부르고 싶어서”다. 경기명창뿐 아니라 판소리하는 사람마저도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고전 중의 고전인 . 김용우의 은 마음을 내려놓은 듯이 “얼씨구나~ 절씨구려~” 하며 시작해 내려놓은 심줄이 툭툭 끊어지듯 내뱉는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하고 이어진다. 무반주로 시작되는 은 여전히 젊지만 이제는 깊어진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는 “부르면 부를수록 가사는 슬픈데, 슬픔에 빠지면 노래의 맛이 나지 않는다”며 “아무리 가사가 슬퍼도 너무 슬프게 부르면 안 되는, 감정을 죽이지 않으면 표현이 따로 가는 노래”라고 말했다. 요컨대 애이불비(哀而不悲) 아니 애이불비도 넘어선 경지의 감정선을 잡지 못하면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노래란 것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노래지만, 지인이 전해준 만신(무당) 지연화 선생의 을 듣고서 더욱 마음이 동했다. 그래도 노래를 녹음할 용기가 나기까지 석삼년이 걸렸다. 1년은 “환장할 만큼 좋은” 지연화 선생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는 “1년을 들으니 겨우 입이 벙긋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또 1년은 무대에서 부르고 또 불렀다. 마침내 그제야 녹음할 용기가 생겼다. 그는 “너무 부르기 어려워서 도전하고 싶은 노래였다”며 “다음에 준비가 되면 또 다른 편곡으로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엔 밴드의 반주에 맞춰 불렀지만, 언젠가는 무반주로, 또 언젠가는 완성된 김용우의 ‘류’로 “평생을 도전할” 노래다.
김용우는 20대에 일찍이 스타가 되었다. 대기만성이 적지 않은 국악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유명인으로 나이 들어가는 불안과 위기를 겪었을 법하다. 때로는 몸의 변화와 함께 오는 소리의 변화에 놀라진 않았을까. 그는 “우리 노래가 힘으로 부르는 노래도 아니”라며 “오히려 선생님들한테 들었던 마흔다섯부터 쉰다섯까지 10년의 전성기가 이제 시작되지 않을까 설렌다”고 답했다. 소리꾼에겐 나이가 거꾸로 ‘하이’(high)를 주기도 한다. 그는 “요즘은 무대에서 뜬금없이 예전에 표현이 안 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표현돼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옹골진 소리”가 나온단다. 이렇게 김용우는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음악에 대해선 낙천적”이고,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안숙선 선생님도 마흔이 넘어서 꽃을 피웠고, 박동진 선생님도 쉰에 가까워 알려졌다”며 “스스로 관리만 잘한다면, 나이 드는 일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소리가 나오지 않아 무대 뒤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제2의 전성기의 예감에 설렌다.
10년 음악 여행의 결론은 ‘덜어내기’김용우는 가끔 스스로를 “민요 가수”라고 농담한다. 이 말에서 국악인으로 느끼는 비애의 색깔만 덜어내면 오히려 민요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는 민요의 대중화를 사명으로 여겨왔다. 서양 악기를 끌어오고, 서양 리듬과 부딪히는 실험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음악적으로 동분서주해왔지만, 분명히 “원형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은 있었다. 그렇게 10여 년 경계를 넘는 음악 여행을 해온 그가 이른 결론은 “덜어내기”다. “덜어내면 자연스럽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름답다”, 인터뷰의 앞뒤에 나온 말이다. 그는 “목이 정말 잘 나오는 시점이 되면 12가사·시조 같은 정악(正樂) 음반도 꼭 내고 싶다”고 다짐했다. 민요와 퓨전에 가려졌지만, 그는 무형문화재 12가사 이수자다. 이렇게 정악과 민요, 서양과 동양을 넘나드는 김용우의 음악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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