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은 중국과 대만, 양 중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대만 국민당의 아버지이자 중국 공산당의 친애하는 동지로 추앙된다. 삼민주의를 주창한 쑨원의 사상은 중국이 봉건의 어둠에서 벗어나 현대화의 길을 밝힌 횃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만에선 장제스 기념관보다 쑨원 기념관이 사랑받고, 대만 화폐 100NT에는 쑨원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국공합작 당시에 국민당보다 공산당을 지지했던 쑨원은 중국 본토에서도 근대화의 아버지로 기억된다. 그의 부인은 쑨원 사후에 장제스의 국민당에 반대하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협력했다. 이렇게 양 중국이 공히 근대의 아버지로 합의하는 독특한 인물이 쑨원이다.
〈8인: 최후의 결사단〉
봉건왕조 타도를 주창해 외국으로 쫓겨났던 쑨원이 1906년 자유의 땅, 홍콩으로 돌아온다. 청 왕조가 다스리는 중국에서 홍콩이 그나마 자유의 땅인 이유는 그곳이 영국에 점령돼 왕조의 관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쑨원은 중국 각지의 지도자를 만나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는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홍콩으로 온다.
국민당·공산당 공동의 추앙 대상, 쑨원
중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천더썬(진덕삼) 감독의 은 당시 홍콩에서 쑨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8인의 얘기를 그린 영화다. 여기엔 1906년뿐 아니라 2010년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인 중국 현대화의 염원이 담겨 있다. 중국이든, 대만이든, 홍콩이든, 중화의 지식인이 지금 소망하는 것은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무엇을 통해서건 중국이 근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선언처럼 봉건세력에 저격당해 숨지는 지식인은 영화의 도입부에 “낡은 중국은 죽고, 새로운 중국이 태어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러진다.
그러나 당시의 홍콩은 애매한 자유의 땅이다. 홍콩의 행정을 관할하는 영국은 중국의 봉건세력과 근대세력 사이에서 애매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열린 틈새로 청 왕조는 쑨원을 제거할 암살단을 보낸다. 그러니까 의 기본 구도는 봉건왕조와 근대세력의 대립이다. 쑨원을 지키는 8인의 인물은 계급·계층을 막라한 중국 인민으로 구성된다. 신문사를 운영하며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도 있고, 원래는 자금만 지원하려 했으나 점점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는 대부호도 있다. 부호의 17살 외아들은 삼민주의에 심취해 쑨원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고, 부호에 대한 강직한 충성심을 지녔고 부호의 아들과는 둘도 없는 친구인 젊은 인력거꾼도 쑨원을 지키려고 나선다. 계급을 넘어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에 대한 ‘상투적’ 회고다.
여기에 올림픽 같은 인물 배치도 있다. 거대한 중국을 상징하는 거인이 나오고 기예가 뛰어난 소녀가 등장하는 것이다. 소림사 출신의 거인은 미국프로농구(NBA)에 진출한 야오밍이 대표하는 거인 중국을 은유하고, 역시 무술이 뛰어난 소녀는 중국 여자 탁구선수 혹은 체조선수가 재현하는 이미지에 조응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중국 근대화는 봉건계급을 넘어서고, 여성을 해방시켰으며, 이들은 손잡고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영화는 캐릭터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클리셰의 화룡점정, 부호의 아들은 똑똑하고 인력거꾼은 충직하며 거인은 소탈하고 소녀는 가족사의 아픔을 지녔다.
배우들의 면면도 중화권 영화의 역사를 계승하고 뒤집는다. 도박에 빠진 경찰로 왕당파에 협조하다 회심해 쑨원을 지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은 무술영화의 전설적 스타가 된 전쯔단(견자단)이 맡았다. 쑨원을 지키는 지식인 역할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92)으로 기억되는 량자후이(양가휘)가 연기한다. 이들뿐 아니라 쩡즈웨이(증지위), 왕쉐치(왕학기), 후쥔(호준)같이 중화권 국민배우라 불러도 무방할 중견배우들이 총출동했다. 홍콩의 젊은 스타인 셰팅펑(사정봉)은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버리고 인력거꾼으로 변신했다. 캐릭터의 반전도 있는데, 홍콩 배우 중에서 드물게 멜로스타 이미지를 가진 리밍(여명)이 가문의 아픔을 가진 무림의 고수로 깜짝 등장한다.
이렇게 근대 중국 역사에 무림 액션을 섞은 영화는 지난 연말 중국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개봉 첫날 2500만위안(약 42억원)의 2009년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고, 첫 주엔 1억1300만위안(약 188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폭력적 근대화’ 옹호하는 듯한 내용도사실 에서 영화 자체는 핵심적 코드가 아니다. 이런 영화에 중국인이 열광하는 이유를 읽는 것이 더욱 절실하고 흥미롭다. 1990년대 홍콩에서 일하는 중국 출신 남녀의 사랑을 다룬 을 감독했던 천커신(진가신)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는 중화주의에 심취한 영화는 아니다. 영웅보다는 영웅을 지키려 애썼던 평범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춘 것만 보아도 그렇다. 같이 중화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영화가 쏟아지고 이런 영화가 인민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 중국에서 보면, 은 거칠지 않은 ‘착한’ 영화다.
그런데 여기에도 중국 현대화의 길에서 벌어지는 희생을 당연시하는 논리가 넘쳐난다. 영화에서 쑨원은 거의 한 말씀만 하시는데, 그것이 “현대화의 길은 피로 포장돼 있다” 같은 근대지상주의 언어다. 중화주의를 포함한 국가주의, 집단주의에 민감한 관객을 아연케 할 요소가 영화 곳곳에 잠복해 있다. 이렇게 비교적 덜 애국적인 중국 블록버스터 영화도 이 정도다, 여기에 을 곱씹어볼 이유가 있다. 제작비 2300만달러를 들인 액션 블록버스터 은 1월21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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