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카메라에 담은 ‘60년 전 전쟁’의 상흔

사진작가, 에티오피아 이어 터키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담은 사진전 열어
등록 2009-06-25 20:55 수정 2020-05-03 04:25

뷰파인더가 흐릿하지만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 앞에 앉은 노인의 표정은 담담한데 사진작가 이병용(52)만 가슴이 먹먹하다. 눈물이 맺히고 목이 잠겨 촬영을 위한 포즈 요구도 못했다. 이마에 움푹 파인 상처를 가진 노인. 이병용 작가는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넣고 사진설명을 붙였다. “뷰파인더가 흐린 건 내 눈이 나빠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 참전용사와 유가족들. 이병용 사진작가는 이국따에서 60년 전 전쟁의 상흔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진 이병용 제공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 참전용사와 유가족들. 이병용 사진작가는 이국따에서 60년 전 전쟁의 상흔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진 이병용 제공

지난해 6개월간 터키를 방문했던 이병용 작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참전용사들과 유가족 2천여 명을 만나 사진으로 그들을 기록했다. 젊은 시절, 친구 나라를 돕겠다며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죽거나 다친 참전용사들은 이제 70∼80대 노인이 돼 있었다. 이병용 작가는 그들을 처음 만날 때도, 사진을 찍고 헤어질 때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이 작가는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들의 사진을 찍자고 마음먹었을 때보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느껴지는 사명감이 더 크더라”고 말했다.

터키에서 찍어온 사진 50여 점과 100여 명의 사연글은 6월12일부터 7월15일까지 경기 양평 갤러리 ‘와’에서 전시한다. ‘UN 21개국(참전국 16개국과 의료 및 물자 지원 5개국 포함) 한국전쟁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의 두 번째 전시회다. 지난해에는 에티오피아전을 열었다. “각 나라에 있는 참전용사협회 등에 직접 문의해 참전용사들을 소개받아 사진을 찍고 있어요. 첫 전시회가 끝나고 운명이다 싶을 만큼 그만둬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두 나라만 했을 뿐인데 비용이 다 떨어져가네요. 허허.”

어느덧 70~80대 노인이 된 용사들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은 정부지원 사업이 아니다. 이병용 작가가 사비를 털어 하고 있다. 나라별로 21번 전시회를 하려던 생각은 형편상 접었다. 국고 지원도 없이 그가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이유는 “잊혀지는 한국전쟁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2006년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이 내한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불현듯 해외 참전용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어요. 어릴 때 상이용사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이 공짜로 학교 다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아픔은 모른 채 철없이 부러워했던 기억도 떠올랐고요. 사진 찍는 재주가 있으니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을 해보자 하고 시작했죠.”

돈도 다 떨어져간다면서 그는 천하태평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 지원이 없는 것은 아쉽지 않다면서 정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돌보지 않는 서운함만 얘기한다. 에티오피아와 마찬가지로 터키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을 찍으러 온 한국 사진작가의 방문을 낯설어했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하면 처음에는 뜬금없어하죠. 찾아온 이유를 듣고 나면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요. 일부러 찾아온 한국인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온갖 환대를 해주었어요.” 참전용사들을 대하는 문화적 차이도 경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참전용사들이 존경의 대상이거나 하진 않잖아요. 터키에서는 영예로운 대접을 받아요. 참전용사임을 알려주는 표식과 모자가 있는데, 이걸 쓰고 있는 노인이 있으면 마주치는 젊은이들마다 그들의 손등에 키스하고 손을 이마에 갖다대는 인사를 하죠.” 포로로 잡혔던 이들은 불명예스럽다며 사진촬영을 거부할 만큼 참전용사들은 자긍심이 컸다. 내 나라의 국민과 영토를 지키는 것도 아니니 돈 때문에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한 노인의 반문 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거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9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누군가에겐 교과서 속 역사지만 누군가에겐 현실이다. 한국전쟁이 낳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산과 이별의 고통을 안겨줬다. 우리 민족이 앞장서 추슬러야 할 슬픈 고통들이다. 이병용 작가가 터키의 한 산골 마을에서 만난 메르신 할머니에게 한국전쟁은 지독한 외로움을 안겨줬다. 결혼 여섯 달 만에 남편을 한국전에서 잃은 할머니는 일가친척도 없어 팔십 평생을 혼자 살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곤경에 처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남편이 자랑스럽다”며 카메라 앞에 서줬다. 이 작가는 답례로 할머니가 남편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는 결혼증명서 속 사진을 확대해 액자에 넣어드렸다. 이 작가는 “에티오피아나 터키에서 만난 참전용사들과 유가족들은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더라”며 “지독한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생하는 에티오피아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 여건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줬으면 했고, 터키에서는 자신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만 하더라”고 말했다.

2017년까지 사진집·에세이집 등 낼 계획

이병용 작가는 2007년부터 시작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를 10년 뒤인 2017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글로도 참전용사들의 기록을 남길 생각이다.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엮어 에세이집, 사진집 등을 준비 중이다. “바람이라면 그때쯤 통일이 돼 지나간 냉전시대의 추억쯤으로 회고하는 전시회를 한 번 더 열었으면 합니다. 그 자리를 빌려 각국의 참전용사와 유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위안하는 자리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문의 031-771-5454.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