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여기 일용할 ‘인간 피’ 있나니

욕망의 끝에서 만나는 허무 그리고 구원, 드디어 공개된 ‘박찬욱 월드’ <박쥐>
등록 2009-05-01 14:56 수정 2020-05-03 04:25
영화 <박쥐>

영화 <박쥐>

<font color="#A341B1"> *스포일러로 읽힐 부분이 있습니다.</font>

잔혹하고 아름다운 뱀파이어 영화인 에는 욕망을 넘어선 윤리적 죽음(희생)을 선택하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 굶주림에 지친 주인공 뱀파이어 소녀에게 물렸다가 살아난 중년의 여성은 흡혈에 대한 피 끓는 욕망을 느끼면서 자신이 뱀파이어가 됐음을 깨닫는다. 타인의 죽음(피)을 통해서 사느냐, 자신을 버리고 죽느냐, 선택의 기로에 처한 그는 단호한 결단을 내린다. 자신을 문병 온 이에게 커텐을 올려달라고 부탁해 스스로 햇볕에 불타 숨지는 최후를 택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주인공 소녀의 생존과 대척에 서 있다. 뱀파이어 소녀는 자신을 대신해 피를 구해오는, 다르게 말해서 살인을 대신하는 남성을 세대를 넘어 선택하며 생존을 이어간다. 소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뱀파이어다. 보통의 인간이 끝없는 욕망에 굴복하면서 하루를 연명하듯이, 뱀파이어 소녀도 끝없는 인간의 희생을 통해서 생존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선택하지 않아도 다가오지만, 뱀파이어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면 죽지 못하는 존재다. 그래서 뱀파이어의 생존은 인간의 욕망과 직유를 이룬다. 뱀파이어에게 생존이 (단호한 결단이 없으면) 멈추지 못하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욕망은 역시나 끊기 어려운 유혹이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도 불멸의 존재가 선택하는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욕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아들

박찬욱의 예술은 대비에서 나온다. 그의 영화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돌고 도는 과정이다. 오대수의 평범한 세치 혀 놀음이 어떻게 끔찍한 자살을 낳았나를 거꾸로 추적하는 과정이 라면, 괴물 같은 금자씨가 된 친절한 금자양이 어떻게 진짜 살인괴물을 단죄하는지를 쫓아가는 과정이 라면, 는 선의로 넘쳤던 신부가 어떻게 쾌락을 갈구하고 피를 욕망하는 수렁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어두운 욕망의 화신인 흡혈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그래서 의 주인공 상현(송강호)은 신부다.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로 시작하는 상현의 기도문은 어린 상현을 옭아맨 죄의식을 집약한다. 상현이 신에 갇혔다면, 태주(김옥빈)은 집에 갇혔다. 어려서 버려진 태주를 라 여사(김해숙)가 거둬서 키웠다. 태주는 그의 집에서 라 여사의 병약한 아들인 강우(신하균)를 간호하는 인형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어른이 돼서는 강우의 아내가 됐다. 영화의 초반에 태주의 눈 밑에 드리운 거뭇한 어둠은 태주의 생기 없는 인생을 상징한다. 이렇게 상현과 태주는 태생부터 욕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아였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불행은 무심한 행동이나 심지어 선의에서 시작된다. 신실한 사제인 상현은 전염병 ‘이브’(EV)를 예방할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소에 실험 대상을 자처한다. 식물인간이 된 지인인 효성 같은 환자들을 돕겠다는 선의다. 여기서 상현의 기적 같은 불행이 시작된다. 50명(혹은 500명)의 실험 대상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현은 ‘붕대 감은 성자’로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 상현은 수혈로 뱀파이어가 됐다. 골골 앓는 아들의 병을 고칠 욕심으로 라 여사가 병을 고치는 성자로 추앙받는 상현에게 접근한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친구였던 상현과 강우 그리고 태주가 다시 만난다. 이렇게 조우한 상현과 태주의 허벅지엔 핏자국이 선명하다. 상현은 성욕이 불타는 밤이면 피리로 허벅지를 때렸고, 태주도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성욕을 누르기 위해서 가위로 허벅지를 찔러왔다. 그렇게 억눌렸던 이들이 눈을 마주치고 손을 마주 잡고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들은 욕망의 고삐가 풀린 흡혈귀와 인형의 집에서 도망칠 준비가 된 여성이 아닌가. 싱싱한 육체의 만남은 화학적 결합을 일으키며 불꽃처럼 타오른다.

의 영어 제목은 〈Thirst〉(목마름). 이제 영화는 흡혈귀가 된 사제가 어떻게 피의 굶주림과 싸우고 애정의 목마름을 푸는지로 나아간다. 상현은 유부녀 태주를 향한 욕망을 과연 멈출 수 있는가. 사제의 임무와 대척에 서 있는 살인 행위는 상현의 생존과 맞닿아 있는데, 이런 딜레마 속에서 상현은 살인하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까. 이렇게 두 가지 딜레마 속에서 상현은 나름의 자구책을 찾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고삐가 풀린 욕망에 쉽사리 제동이 걸린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므로. 그렇게 상현은 태주를 위해서 혹은 자신을 위해서 금기의 선을 넘는다. 나중에 그것이 거짓 이유란 사실을 알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사랑에 굶주리고 피를 갈구하는 상현은 고난 속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결국 는 욕망의 해방과 경계와 종말에 관한 영화다. 영원히 가두지 못하고, 끝없이 풀어헤치지도 못하며, 다시 접지도 못하는 욕망의 실타래에 관한 고전적 얘기가 다.

쾌락의 길로 들어선 상현(송강호)에게 태주(김옥빈)는 살아서 현현한 천국이다. 태주에게 신부 상현은 “불쌍한 노총각”일 뿐이다.

쾌락의 길로 들어선 상현(송강호)에게 태주(김옥빈)는 살아서 현현한 천국이다. 태주에게 신부 상현은 “불쌍한 노총각”일 뿐이다.

이토록 아이러니한 장면이 실감나다니

사회적 코드를 놓치지 않는 박찬욱 감독은 에 질병에 대한 은유를 심었다. 상현이 걸린 이브(혹은 뱀파이어 감염)는 현대 전염병에 대한 명백한 은유다. 감염이 되면 수포가 생기는 이브는 감염 경로와 발병 증상에서 익숙하다. 수혈로 감염되고 키스로는 전염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면에선 에이즈 감염 경로를 떠올리게 한다. 백인과 동양 남성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전제는 에이즈와 에볼라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역발상이다. 그러니까 이브는 에이즈이자 에볼라이자 한센병이다. 이브에 감염된 상현이 성자로 추앙받는 것도 묘하게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다. 뱀파이어의 커밍아웃도 마치 성정체성 커밍아웃처럼 한다. 다만 의 커밍아웃 장면은 마냥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뱀파이어란 사실을 있을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드는 묘한 분위기다. 그것은 배우 송강호가 가진 힘에 크게 기댄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출한 방에서 오직 송강호의 몸짓과 눈빛과 대사로 이토록 아이러니한 장면에 실감을 불어넣고 유머까지 끌어낸다. 누구를 연기해도, 심지어 뱀파이어로 나와도, 송강호는 캐릭터에 설득력 넘치는 정감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뱀파이어 상현이 마시는 인간의 피는 그저 일용할 양식으로 보인다. 마치 노신부가 마시는 포도주처럼. 이것이 인간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뱀파이어 영화 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의 대중적 매력은 호흡이 빠르단 것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나가는 면에서 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 가운데 에 가깝다. 이제는 사건이 끝나나 싶은 순간에 한 번의 반전을 더 주어서 재미를 더한다. 신부가 역병에 걸리고 흡혈귀가 돼서 사건에 휘말리고 다시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흐름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에 신부에 대한 추앙이 벌어지고 애정이 뒤엉키는 현실적인 장면과 뱀파이어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동화 같은 장면이 엇갈리며 시각적인 포만감을 선사한다. 태주와 상현이 벌이는 섹스신은 처절하지 않으면서 절절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실감난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지붕과 지붕 사이를 날아다니는 장면의 쾌감은 상현의 품에 안겨서 아득한 공간을 날았던 태주의 꿈같은 표정에 미치지 못한다.

여기저기 풋풋 터지는 뇌관

에서 자살은 중요한 모티브로 세 번 언급되는데, 사제로서 상현은 자살을 지옥에서 무기징역을 살 죄악이라고 말한다. 뱀파이어로서 상현은 자살을 원하는 사람의 일종의 안락사를 돕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자살은 인간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는 ‘박찬욱 월드’의 경계를 넘지는 않는다. 딜레마에 처한 인간이 욕망의 끝에서 만나는 허무 그리고 구원의 문제, 박찬욱 감독이 천착해온 주제의 또 다른 변주다. 그것이 진전인지 답보인지 논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참, 마지막 장면은 갑자기 눈물이 솟구칠 만큼 애절하고, 영화의 여기저기에 풋풋하고 터지는 뇌관이 숨어 있다. 2009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는 4월30일 개봉한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뒷이야기
<font size="3"><font color="#006699">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 얻었네</font></font>


소설 <박쥐>

소설 <박쥐>

박찬욱 감독은 영화 가 에밀 졸라의 소설 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1867년 발표된 은 사실주의 소설로 상류층 주인공이 소설의 주류였던 시대에 하층민의 불륜을 다뤄서 충격을 주었던 작품으로 졸라의 출세작이다. 박 감독은 에서 뼈대를 빌려왔다. 어릴 적 고모에게 맡겨졌던 테레즈가 병약한 사촌 카미유와 결혼하지만 불만족에 시달리고, 남편 카미유의 친구인 로랑을 만나서 불륜에 빠진다는 내용은 의 흐름과 유사하다. 하지만 시대 배경이 바뀌고, 뱀파이어 캐릭터가 더해지고, 종교(가톨릭)적인 요소가 녹아들면서 는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박 감독은 고전에서 모티브를 얻는 경우가 적잖은데, 전작인 도 도스토옙스키의 을 떠올리며 썼다고 밝혔다.
영화 와 함께 소설 (출판사 그책)도 나왔다. 박찬욱 감독이 정서경, 최인씨와 함께 쓴 소설 에는 영화 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소설의 ‘프롤로그’엔 태주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얘기가 나온다. 라 여사의 딸로 양육됐다기보다는 병약한 강우의 강아지처럼 사육당한 태주의 성장기를 읽으면 왜 태주가 그토록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지 이해가 깊어진다. 고아원에서 상현을 키웠던 노신부의 상세한 심리묘사도 소설에 나오는데, 이것도 영화의 이해를 더한다. 아버지를 죽이고서 아버지가 되는 살부 의식이 를 어떻게 관통하는지, 노신부의 독백과 상현의 심리묘사를 통해서 보게 된다. 여기에 상현을 병을 고치는 성자로 추앙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생생하다. 영화에서 상현에게 강간당하는 소녀의 시선에서 상현이 어떻게 성자로 추앙받고 괴물로 변해가는지를 소설은 영화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소설 는 영화 의 해설서 구실을 한다. 영화와 소설을 비교해가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