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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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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나라에도 동화가 있답니다

다문화 어린이도서관 ‘모두’에서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엄마나라 동화’ 모임
등록 2009-04-02 11:18 수정 2020-05-03 04:25

“깜언!”
베트남 엄마를 둔 6살 민주도, 한국에서 9년째 사는 이란 엄마도, 몽골 엄마와 함께 온 6살 은주도 모두 공손히 손을 모으며 베트남어로 감사의 인사 “깜언”을 외쳤다. 3월26일 오후 2시 서울시 이문동에 위치한 다문화 어린이도서관 ‘모두’에선 ‘엄마나라 동화’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먼저 민주의 엄마 레티뒈한씨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며 베트남 문화를 설명했다. 처음 베트남 문자를 보여주자 다짜고짜 “한글이 더 좋아요”라고 외치던 아이도 아오자이 사진이 나오자 “예쁘다”며 웃었다. 이번엔 초가집을 보여주자 “어, 비슷하다!”며 놀라는 아이도 있었다.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은 엄마나라 문화가 한국과 ‘다르고 같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었다.

다문화 어린이도서관 ‘모두’에서 몽골인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몽골 동화를 들려 주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다문화 어린이도서관 ‘모두’에서 몽골인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몽골 동화를 들려 주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몽골 동화구연 보고 ‘짜넴’도 먹고

은주의 몽골인 엄마 암가마씨가 토끼, 사자 인형을 들고 나오자 아이들 눈빛은 더욱 똘망해졌다. 암가마씨는 몽골 동화 를 몽골말로 한 번, 한국말로 한 번 번갈아 들려주기 시작했다. “옛날에 사자가 토끼 엄마를 죽였어요. 그래서….” 결국엔 토끼가 그물을 이용해 사자를 잡았단 얘기다. 정성껏 동화구연을 준비해온 암가마씨는 “떨려서 제대로 못했다”면서도 “아이에게 엄마나라 얘기를 들려주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동화가 끝나자 레티뒈한씨가 준비한 베트남 만두 짜넴을 돌려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렇게 ‘모두’에선 지난해 11월부터 목요일마다 다문화 가정의 엄마가 직접 모국의 동화를 모어(母語)로 들려주는 ‘엄마나라 동화’ 모임이 열린다. 모두지기 김정연씨는 “인근 유치원 아이들이 외국 동화를 들으러 견학을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도 한국인 부모를 둔 ‘한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앞으로 외국인 엄마들은 학교로 ‘출장강연’도 나갈 계획이다. ‘모두’의 문종석 대표는 “고국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차별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엄마들 열성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언제나 배우는 대상이었던 결혼이민 여성들이 이렇게 동화구연을 통해서 가르치는 주체로 변한다. 이것은 이들의 자긍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엄마의 자긍심은 아이의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문 대표는 “언제나 ‘엄마는 그것도 몰라’라고 했던 아이들이 엄마가 친구들 앞에서 신기한 언어로 동화를 읽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를 자랑스럽게 느끼게 된다”고 전했다.

4월3~5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리는 ‘엄마나라 이야기’ 콘서트 포스터.

4월3~5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리는 ‘엄마나라 이야기’ 콘서트 포스터.

단순히 이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와 엄마의 소통과 유대의 문제다. 타이인 엄마 우싸씨는 아들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타이어로 태교했다. 타이어 노래를 불러주고 동화를 읽어줬다. 일터에 나가는 아빠 대신에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는 “엄마”보다 먼저 “메”(타이어로 엄마)를 말했다. 이렇게 엄마와 타이어, 아빠와 한국말로 대화한 아이들은 지금 두 나라 언어를 구사한다. 재현(7)이는 기자에게 “아저씨는 남자니까 ‘안녕하세요’를 ‘싸와디 카’가 아니라 ‘싸와디 캅’이라고 해야 돼요”라고 재잘거렸다. 어미에 여성은 ‘카’, 남성은 ‘캅’을 붙이는 타이말 어법을 이렇게 몸으로 익혔다. 요즘도 재현·정현(6)이는 일주일에 30분씩 엄마에게 타이어를 배운다. 우싸씨는 ““이렇게 공짜로 외국어를 (엄마한테) 배우는데 안 가르치면 아깝잖아요”라며 웃었다. 그는 “아이들은 한국인이자 타이인 아니냐”며 “타이말을 못하면 외갓집 식구들과 정을 느끼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1년에 한 달씩 엄마의 고향에 가는 아이들은 경찰관 삼촌이 자랑스럽고, 타이인 친구가 그립다. 타이말을 하는 덕분이다. 그러나 우싸씨는 “한국말만 쓰다 보니 깊은 얘기를 아이와 못해서 답답해하는 친구들도 많다”고 전했다.

결혼이민 여성들은 한국인 되기를 강권당한다. 한국인 되기의 기초는 한국어 배우기. 그래서 아이와 대화할 때에도 한국말만 쓰기를 강권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상당수 결혼이민 여성은 한국에 들어와 한두 해 지나지 않아서 아이를 갖는다. 우사씨도 그랬다. 그러나 한두 해 만에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주여성은 매우 드물다. 문종석 대표는 “지금 당신에게 영어로 아이를 키우라고 한다면 가능한가?”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주변이 문제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은 엄마가 모어를 쓰면 싫어한다. 혹시나 아이가 한국말을 잘 못하면 어쩌나 걱정해서다. 그러나 기우다. 오히려 모어를 자꾸 못 쓰게 하면 아이와 엄마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아시아의 친구들’ 차미경 대표는 “단순히 아이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문제를 넘어서 언어 발달이 민감한 시기에 필요한 자극을 주지 못하니 아이의 언어능력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적잖다”고 말했다. 그래서 다문화 운동가들은 ‘모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조한다.

엄마-아이 사이 좁혀주는 모어 교육

8살 세진이와 4살 예진이를 키우는 몽골인 서열마씨도 처음엔 아이가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말로 대화했다. 그러나 자신의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아 의사소통의 한계를 느꼈다. 몽골어를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5살 세진이를 석 달가량 몽골에 보냈다. 세진이는 몽골어 말문이 터져서 돌아왔다. 대신에 한국어 말문이 조금은 막혔지만 금세 회복됐다. 요즘엔 외할아버지가 넉 달째 같이 살고 있어 다시 몽골어 실력이 늘었다. 이렇게 한국어와 몽골어를 왔다갔다 하면서 세진이는 이중언어 능력을 키우고 있다. 서열마씨는 “몽골어를 하면서 아이들과의 관계도 더욱 좋아졌다”며 “앞으로 몽골어 문자도 가르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첫아이를 키우며 모어 교육의 기회를 놓친 엄마들 가운데 앞으로 태어날 둘째에겐 모어 교육을 하겠단 사람들이 적잖다.

이렇게 이중언어 교육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자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다. 문종석 대표는 “아이가 커서 차별을 당하면 비난의 화살을 생김새가 다르고 말도 어눌한 엄마에게 돌리는 경우가 불행히도 있다”며 “그래서 엄마나라 말과 문화를 가르쳐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지어 일본인 엄마를 둔 아이가 엄마가 일본어를 쓰면 싫어하는 경우도 보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모어 교육엔 남편의 이해와 가족의 지지가 절대적 요소다. 이중언어 교육이 언어능력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검증됐지만, 가족들은 ‘혹시나’ 한국어 걱정을 떨치지 못한다. 여기에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같은 저개발 국가의 언어에 대한 폄하도 더해진다. 우싸씨가 타이어 교육에 나섰던 이유도 “시어머니도 타이말을 가르치라고 응원했기” 때문이다.

동화엔 말뿐만 아니라 문화도 들었다. 그래서 12개국 5천여 권의 다국어 도서를 구비한 ‘모두’엔 동화책이 많다. 제3세계 그림동화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올리볼리 그림동화’(ollybolly.org) 서비스도 3월19일 시작됐다. 다음세대재단이 운영하는 이곳에선 베트남·몽골·필리핀 애니메이션 10편을 한국어, 원어, 영어로 볼 수 있다. 엄마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연도 열린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4월3~5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춤추는 평화-엄마나라 이야기’ 공연에선 베트남 동화 를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 여성 도금영씨가 원어로 읽어준다. 여기에 베트남 연주가 베이트 홍씨의 전통악기 연주가 더해진다. 이 공연을 끌어가는 가수 홍순관씨는 “이 땅에 사는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나라별로 한 해씩 채워가면 공연이 최소한 10년은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주는 사람의 이동일 뿐 아니라 문화의 전파다. 한국인 혼혈인이 한국어를 못하면 눈살을 찌푸리는 한국인이 여기에 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의 엄마 말 배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최소한의 역지사지도 못하는 자들의 무례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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