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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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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려는가

김기덕 감독이 내놓은 가장 절망적인 영화 <비몽>
등록 2008-10-10 14:02 수정 2020-05-03 04:25

김기덕의 열네 번째 작품인 이 공개됐을 때, 영화에 대한 평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한편에서는 김기덕이 치유와 화해를 말하기 시작했다고 안도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더욱 무시무시한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우려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이 김기덕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한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영화에서 죽음이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고통을 정지시키고 궁극의 화해를 이루는 초월적인 이행이 될 수 있음을 밝힌 적은 있다. 그것을 그저 죽음에의 동경이라고 부르건, 죽음을 끌어안는 태도라고 부르건, 분명한 건 이제 그의 작품들이 죽음을 말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작품인 은 그런 예감에 대한 답이다. (내 생각에) 은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명징하고, 가장 관념적이며, 가장 절망적이다. 그리고 만약 김기덕의 말대로 이 영화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본다면( 672호 인터뷰), 은 어떤 면에서는 사랑의 (필연적) 불가능성을 매우 처참하게 깨우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비몽〉의 남녀 주인공,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 한국과 일본의 스타가 저예산의 김기덕 영화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비몽〉의 남녀 주인공,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 한국과 일본의 스타가 저예산의 김기덕 영화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남자(진·오다기리 조)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난 남자는 악몽에서 깨어나 꿈에서 보았던 그 장소로 간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꿈에서처럼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경찰은 뺑소니 차량이 세워진 집에 들어가 한 여자(란·이나영)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남자는 그 사고는 자신이 꿈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고백하고 여자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사고 현장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는 여자의 모습이 찍혀 있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며, 영화는 꿈을 꾸는 남자와 그 꿈을 몽유 상태에서 실현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문제는 남자는 꿈에서 자신을 버린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는데, 그럴 때마다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는 자신이 증오하는 옛 애인을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정신과 의사(장미희)는 진과 란의 운명에 대해 ‘한 사람이 행복해지면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며 이 고통의 해결책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 즉 사랑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한다. 그녀는 ‘사랑’이라고 했지 삶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란의 몽유병이 나아질 것이라고 했지 둘이 모두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시 질문하자면,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고통의 해결책은 하나, 사랑하라

진이 잠이 들 때 란은 깨어 있어야 하며, 란이 잠을 잘 때 진은 깨어나야만 한다. 서로가 반대일 때, 이들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내에서 진과 란이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깨어 있음에 의존하게 되는 절실한 과정은 아무리 김기덕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친절히 설명되지 않는다. 진과 진의 옛 여인, 란과 란의 옛 남자 이렇게 네 명의 인물이 각기 분리된 인간들인지, 누군가의 환상인지, 한 사람의 다층적인 거울인지, 나아가 그것이 누구의 꿈이고 기억인지조차 불분명한 순간들도 있다. 심지어 진은 시종일관 아무렇지도 않게 일본어로 말하지만 란은 한국어로 대답한다. 이 모든 낯설고 비일관적인 설정이 서사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고 불평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애초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좀더 거칠게 말해서 의 인물들은 이 영화가 품은 관념을 전달하는 껍데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들은 각각 영화 속 꿈과 현실, 불행과 행복, 혹은 증오와 사랑, 흰색과 검은색 등 끝도 없이 이어질 대립항의 대리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물의 구체적인 삶이 아니라, 이 대립항 사이의 경계다. 나아가 그 경계가 지워지는 순간이며 단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합일되는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그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다른 말은 죽음이다.

에 이미 죽음이 드리워졌어도 에서만큼 죽음을 향해 내달리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다수의 비극적 멜로가 택하는 사랑과 죽음 충동의 상투적인 묶음과도 다르다. 진과 란에게는 오직 죽음이라는 해답밖에 없으며, 이 세계를 고통과 분열에서 구원하는 건 죽음뿐이다. 그것이 자살이건 타살이건 환상으로의 사라짐이건 세계를 멈출 수 있는 건 죽음뿐이다. 영화의 후반부, 란이 정신병원에 갇힌 뒤, 진은 잠들길 거부하며 깨어 있기 위해서 자신의 온몸을 자해한다. 그가 어두운 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을 피로 물들일 동안, 란은 눈부시게 하얀 정신병원 방 안에 멍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기보다는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마치 합일 이전 최후의 수난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해도 도약도 아닌 먼 길 가는 감독

사실 그의 영화에서 육체적인 학대의 이미지는 낯익은 것이지만, 의 그것은 다른 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그의 초기작들에서 인물들의 찢겨진 몸은 그 자체가 세상이었고 세상에 대한 발언이었으며 세상을 보는 통로였다. 심지어 이전의 김기덕 영화들과 다르다고 평가되는 에서 여자가 새로워지기 위해, 혹은 어딘가로 돌아가기 위해 생살을 찢어낼 때, 혹은 에서 사형수가 자신의 목을 찌를 때에도 영화는 보는 이의 육신에 아프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의 자해 장면이나 고통은 이상하게도 그런 신체적 울림을 유발하지 않는데 그건 앞서도 잠시 말했듯 영화 속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정신적 산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김기덕은 죽음 이후의 다른 세계에서 가능성을 찾는 것 같다. 그것이 작가로서의 예술적 가능성이든, 한 인간으로서의 삶 혹은 사랑의 가능성이든 말이다. 더욱 이분화되고 둘로 쪼개진 세계의 공존에 대한 그의 열망은 강해지는데, 그는 점점 더 그 공존이 죽음이라는 어떤 초탈된 경지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갈망을 풀어내고 형상화하기 위해 삶의 물질성을 밀어내고 점점 더 추상과 개념의 재현에 기댄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여기서 그가 그리는 죽음은 대립 개념의 공존이 아니라, 합일하는 세계다. 말장난 같지만, 둘은 다르다. 삶 안에 죽음이, 죽지 못하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죽음이 있을 때 그것은 공존이지만, 죽음 안에서 결국 대립을 뛰어넘는 초월을 논할 때 그것은 합일이다. 전자는 어찌됐든 세상과의 싸움이지만 후자는 일종의 포기다. 그것은 화해도 도약도 아니다. 나는 김기덕 영화 속 죽음이 점점 더 정신적 차원의 문제가 되고 무언가 여기와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의미를 띠어가는 게 어쩐지 불길하다. 그의 영화는 죽음(같은 삶)을 고민하는 대신, 자신이 죽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하고 있다. 10월9일 개봉.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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