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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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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먹이를 찾아

문영남 작가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중에서도 가장 극단인 <조강지처 클럽>
등록 2008-09-12 16:52 수정 2020-05-03 04:25

SBS 캐릭터들의 이름은 모두 어딘가 이상하다. 불륜에 가정폭력까지 저지르는 남편의 이름은 한원수(안내상)고, 그에게 당하는 아내의 이름은 나화신(오현경)이며, 나화신의 친구이자 역시 남편 이기적(오대규)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이름은 한복수(김혜선)다. 또한 나화신을 사랑하게 된 멋진 연하남의 이름은 구세주(이상우)고, 구세주를 사랑하면서 나화신과 구세주를 방해하는 여자의 이름은 방해자(윤주희)다. 심지어 한선수(이준혁)의 회사에 들어온 인턴사원의 이름은 ‘신참’이다. 에서 캐릭터의 이름은 캐릭터의 인성과 역할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원수가 나화신을 괴롭히면 구세주가 구해주고, 이기적과 한복수를 갈라놓는 건 허영에 가득 찬 정나미(변정민)다. 그래서 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면적인 캐릭터들로 도식적인 이야기를 반복한다. 한선수와 그의 아내를 제외하면 의 모든 결혼한 부부는 불륜에 휘말리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버림받으며, 그 뒤 착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거나, 남편이 회개하는 모습을 본다.

<조강지처 클럽>은 문영남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폭식이 가장 두드러진다. 처음부터 모든 남녀 커플에게 불륜 관계를 설정한 뒤, 한 가지 관계의 ‘약발’이 떨어질 때마다 더 자극적인 관계를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조강지처 클럽>은 문영남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폭식이 가장 두드러진다. 처음부터 모든 남녀 커플에게 불륜 관계를 설정한 뒤, 한 가지 관계의 ‘약발’이 떨어질 때마다 더 자극적인 관계를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비현실적일수록 시청률 높아

이런 비상식적인 드라마 작법은 의 문영남 작가가 작품의 주 시청자층인 중년 주부를 공략하기 위한 나름의 ‘신상품’이다. 이미 한국방송 같은 작품들이 증명하듯, 문영남 작가는 단순한 캐릭터와 도식적인 구성에 불륜과 로맨스를 섞어 주부들의 열렬한 몰입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들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편의 불륜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처럼 분노하고, 홀로 된 주부의 애틋한 로맨스에 기뻐한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에서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것은 시청률에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캐릭터가 단순할수록,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수록 주부들의 몰입도는 커진다.

그러나 이 ‘신상품’은 새롭기는 하되 제품의 질은 좋지 않다. 문영남 작가가 캐릭터의 내면 묘사를 포기하면서, 그의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이기적이나 정나미처럼 갑자기 ‘회개’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면, 의 모든 캐릭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한원수는 90회가 넘은 지금까지 불륜 상대인 모지란에게 질리자 그를 쫓아내려고 폭력까지 휘두르는 인간 말종일 뿐이다. 에서 구세주를 연기하는 이상우의 연기력이 문제가 돼도 그럭저럭 작품을 끌고 갈 수 있는 것 역시 구세주가 늘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톤으로 로맨스의 주인공 역할만 하면 그만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 캐릭터의 소통 대신 관계를 통해 사건을 만들어낸다. 나화신과 구세주의 사랑이 애틋한 건 그들이 이혼녀와 미혼의 연하남이기 때문이고, 그들의 사랑이 더 힘들어지는 것은 그들 사이에 방해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복수와 길억(손현주)은 ‘불륜 커플의 남편과 아내’로 만나 시작부터 가슴 아픈 사랑을 하고, 결혼을 앞두고는 길억의 아내 정나미가 길억의 아이를 가져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드라마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하고, 이미 꼬일 대로 꼬인 관계에 자극을 주려면 더 비상식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본처 안양순(김해숙)과 첩 복분자(이미영)와 함께 사는 한심한(한진희)의 집안에서 더 큰일이 벌어지려면 자신이 안양순의 아들인 줄 알았던 한선수가 사실은 복분자의 아들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나와야 한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대명사가 된 건 단지 설정이 비상식적이어서가 아니다. 문영남 작가는 드라마를 진행할수록 인간을 깊게 바라보는 대신 마치 먹이를 찾는 괴물처럼 기존의 인간관계를 더 자극적으로 뒤틀 수 있는 ‘거리’를 찾기 때문이다.

문영남 작가가 시청률을 올리는 상업 작가일 수는 있어도 결코 ‘대가’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폭식이 가장 두드러진다. 전작인 한국방송 에서, 문영남 작가는 ‘그나마’ 불륜이나 비정상적인 관계를 줄인 뒤, 작품의 일정 부분을 두 남녀의 로맨스로만 끌고 나갔다. 나설칠(이태란)과 연하남(박해진)의 사랑은 그래도 비교적 그들만의 스토리에 집중했고, 티격태격하는 반찬순(윤미라)과 공수표(노주현)의 관계는 무난한 중년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그러나 은 처음부터 모든 남녀 커플에게 불륜 관계를 설정한 뒤, 한 가지 관계의 ‘약발’이 떨어질 때마다 더 자극적인 관계를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나화신은 ‘한원수와 실질적인 이혼을 했지만 한원수의 거짓말로 법적인 이혼을 하지 못해 구세주와 결혼할 수 없는 관계’로 인해 가슴 아파한다. 관계는 거미줄처럼 얽히고, 그럴수록 자극은 점점 더 커지며, 등장인물의 행동은 극단적으로 변한다.

연장 방영분만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은 문영남 작가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중에서도 가장 극단에 있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선택은 갈수록 드라마를 최소한의 상식선에도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한다. 관계가 꼬일수록 등장인물의 행동은 극단적으로 변하고, 그들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아무리 이기적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아무리 정나미가 길억의 아이를 가졌어도,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비춰보면 이는 한복수와 길억이 이별을 하고 각자 원래의 남편과 부인에게 되돌아간다는 엔딩을 위한 작위적인 선택으로 보일 뿐이다.

문영남 작가의 전작들이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뒀다면, 은 수십 회의 연장 방영분만큼이나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극단적인 관계 사이에서 불륜과 로맨스가 모두 극단적인 방향으로 진행된 이 드라마는 이제 어떻게 마무리되든 해피엔딩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 극단적인 드라마 뒤에 문영남 작가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바람피우는 남편들처럼 “한 번 더!”를 자신 있게 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조강지처’들이라도 너무 심한 바람에는 떠나기 마련이다.

강명석 〈매거진t〉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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