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고 숨겨진 욕망을 함께 떠드는 일요일 밤의 ‘세바퀴’
▣ 강명석 〈매거진t〉 수석기자
문화방송 의 ‘세바퀴’는 현재 공중파 오락 프로그램 중 가장 거창한 제목을 가졌다. ‘세바퀴’는 무려 ‘세상을 바꾸는 퀴즈’의 준말이다. 하지만 ‘세바퀴’의 거창한 선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세바퀴’에서는 정말 세상이 바뀐다.
폭로 대신 유쾌한 수다 한판!
중년의 기혼 여성들이 대거 출연해 퀴즈와 토크를 병행하는 ‘세바퀴’는 일반적인 세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과거 인터넷 방송 시절 여성 연예인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문화방송 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논란을 일으킨 김구라는 ‘세바퀴’에서만큼은 조용히 여성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중년 탤런트 조형기는 다른 프로그램처럼 여성 연예인의 외모를 비교하며 놀리는 대신 자신이 여성 출연자들한테서 아이돌 스타 전진과 외모를 비교당한다. 어지간한 남성 연예인들이 제대로 말도 못해보고 놀림을 당하고, ‘젊고 예쁜 여자’가 아닌 ‘나이 들고 웃긴 여자’에게도 대접받지 못하는 오락 프로그램. 그것이 ‘세바퀴’다.
과거 의 ‘브레인 서바이버’가 나이 든 연예인들로 이른바 ‘낙엽줄’을 만들어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자조적인 개그를 하도록 만들었다면, ‘세바퀴’는 반대로 양희은이 ‘큰언니’, 이경실이 ‘둘째언니’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나이 든 여성이 오히려 힘을 가진다. 그러니 세상이 바뀌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세바퀴’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스튜디오에 한데 모여 자신들의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방송 과 같은 아침 토크쇼에서 정착된 형식이다. 아침 토크쇼는 언제나 주부들의 생활을 토크의 주제로 삼고, 그들의 이야기를 여과없이 듣는다. 그러나 아침 토크쇼는 결국 가족의 화합을 지키고, 주부가 자신의 문제를 고쳐 더 나은 주부가 되고자 하는 다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세바퀴’는 기혼 여성 연예인들을 통해 그들의 현재를 거침없이 ‘질러버리는’ 데 주력한다. 여성 연예인들이 “사랑해”라고 문자를 보내면 어떤 남편에겐 살가운 답장이 돌아오지만, 어떤 남편은 “미쳤어” 같은 답을 보내온다.
한국방송 에서 남편 이봉원이 자신을 좀처럼 안지 않는다는 이야기, 좀처럼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주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으로 화제를 모은 박미선이 ‘세바퀴’의 MC인 것은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한다. 지금까지 주부들이 남들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퀴즈와 이경실, 박미선, 조형기 등이 주축이 되는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 분위기 잡는 폭로가 아니라 유쾌한 수다 한판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은 아침 프로그램처럼 남편과의 트러블을 눈물 섞인 고백으로 풀지 않는다. ‘세바퀴’에는 더 이상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숙련된 주부’들의 유쾌한 체념과, 전날 밤 싸운 남편에게 ‘개다리 춤’ 한 번으로 화해를 청하는 노하우가 담겨 있다.
불편하지 않은 젊은 남성에 대한 열광
특히 ‘세바퀴’는 이런 주부들의 토크를 마치 무정부주의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프로그램에는 세 명의 MC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프로그램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남편의 비상금 얘기든, 남편과의 스킨십 이야기든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한 주제는 MC들이 뜯어 말릴 때까지 계속된다. 심지어 이경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음에 안 드는 발언을 한 이휘재 같은 MC를 때리기도 하고, 출연자들은 서로의 비밀이나 감추고 싶었던 옛날 모습을 폭로하기도 한다. 수많은 주부들이 모여 자신의 입장에서 수다를 떠는 이들의 모습은 흔히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아줌마들의 수다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실제로 보여주는 최초의 예다.
‘세바퀴’에서 주부들이 많이 봤을 법한 문화방송 나 의 대사를 맞히는 퀴즈를 내는 것은 흥미롭다. 이때 ‘세바퀴’의 출연자들은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 상황에 공감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멋지게 변한 자신의 옛사랑이 돌아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내가 장서희 같은 입장이라면 나를 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남편은 주부들이 드라마나 본다며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주부들은 그 드라마를 매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세바퀴’는 드라마 대신 퀴즈로 주부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셈이다.
이는 ‘세바퀴’의 출연자들이 종종 젊은 남성의 몸에 열광하고 나이 든 남성과 젊은 남성, 멋진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을 차별하는데도, 남성들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 비해 불편함이 덜한 이유이기도 하다. ‘세바퀴’에서 여성들의 열광은 실제로 남성에 대해 환호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솔직히 말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욕망을 함께 떠든다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세바퀴’는 한국방송 에 대한 문화방송의 대답처럼 보인다. 는 젊은 미혼 외국인 ‘미녀’들이, MC인 남희석의 통제에 따라 그들 입장에서 본 한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동시에 우즈베키스탄 출신 여성 자밀라로 인한 선정성 논란에 시달렸듯이 ‘미녀’들은 스튜디오의 남성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남성들에게 종종 구경거리가 되곤 한다.
반면 ‘세바퀴’는 한국의 기혼 여성들이, MC가 아닌 자신들의 수다를 통해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남성의 구경거리나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대신 자신들이 주인공이 된다. 물론 는 외국인 여성들을 통해 한국인이 쉽게 말할 수 없는 한국인의 삶을 매우 구체적으로 발언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의 여성들이 언어적 장벽이나 진행 방식, 그리고 그들을 보는 한국인의 시선에 의해 토크의 주도권을 온전히 그들의 것으로 가져오지 못하는 데 반해 ‘세바퀴’는 완벽하게 주부들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직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하지만, ‘세바퀴’의 등장은 현재 공중파 오락 프로그램의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각자의 세계가 빛을 발하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오락 프로그램, 특히 주말의 오락 프로그램은 모든 가족이 모여 보는 것이었다. 에서 ‘몰래 카메라’가 여전히 방영되고 있는 것은 그 상징이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마니아 프로그램’ 이 성공을 거둔 뒤부터 한국 오락 프로그램은 각각 조금씩 취향을 달리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매우 뚜렷한 시청자층을 노리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있다. ‘세바퀴’ 앞에는 젊은 커플들의 이야기인 ‘우리 결혼했어요’가 방송되고, 에서는 추억의 스타들이 나와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는 남자들의 환호를 얻어낸다. 그리고, 여기에 주부들의 세상인 ‘세바퀴’가 등장했다. 각자의 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각자의 세계. 오락 프로그램이 각각의 계층의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가족 안에 묻혀 있던 주부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났다. 오락 프로그램 속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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