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한창나이 여덟 전통 춤꾼이 벌이는 ‘팔무전’ 기획자 진옥섭, 춤기행으로 잔뼈 굵은 그가 ‘구슬 꿰어 보배 만든’ 사연</font>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케이원’이나 ‘프라이드’처럼 계급장 떼고 붙는 춤의 혈투….”
공연기획자 진옥섭(44)씨가 이메일로 보낸 전통춤판 보도자료 서두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격투기, 피 튀기는 싸움이라니, 이름난 전통춤꾼들끼리 서로 몸으로 한판 붙겠다는 뜻일까. 8월28일부터 9월1일까지 서울 대치동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산하 한국문화의집(코우스·KOUS·www.kous.or.kr) 공연장에서 열릴 이 춤판의 정식 이름은 ‘팔무전’(八舞傳)이다. 40~60대 한창 나이에 최고 수준의 기량을 인정받는 8명의 전통춤꾼들이 몸짓으로 푸는 ‘이야기’란 뜻이다. 하지만 이 흥행 마당을 진씨는 서슴없이 ‘싸움’(戰)으로 해석했다.
반편 같고 육갑 같은 대신 여덟이라 구색이 맞네
“팔무전은 춤 이야기인 무용담(舞踊談)이자, 싸움 이야기인 무용담(武勇談)입니다. 춤동네 ‘무림’(舞林)의 최고수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여 닷새 동안 오직 자기 춤의 내공과 자존심 하나로 심판관인 관객 앞에서 겨루는 흥행 대결인 까닭이죠. 제게도 팔무전은 싸움입니다. 무료 공연에 익숙한 관객에게 1만~3만원의 비싼 돈을 받기 때문에 표값만큼의 무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난 6월 코우스 비상근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진씨는 20년 가까이 나라 안 곳곳에 숨은 전통춤의 고수들을 찾아내고 공연을 차려 그들을 세상에 알리는 데 진력해왔다. 전국을 ‘춤기행’하면서 찾아낸 숨은 예인들의 사연들을 담아낸 저서 는 호평 속에 세간에도 유명세를 심었다. 그런 그가 처음 공공예술기관 책임자로 초빙된 뒤 세운 서원은 발레, 뮤지컬처럼 전통춤도 소극장 장기 공연을 하면서 ‘흥행 혁명’을 이루겠다는 것, 그 터전으로 코우스 공연장을 삼겠다는 것이다.
“예술은 짧고 권력은 길다죠. 그동안 전통춤은 제자, 가족들의 박수로 채워지는 발표회 아니면, 전통 보존을 명분으로 관 주도의 공짜 공연들만 했지요. 본디 밥값 벌던 판이 그렇게 변질되다 보니 긴장이 떨어지고 외면당할밖에요.”
그래서 공짜 춤만 보여주던 공연장에서 비싼 입장료를 받고 제값만큼 보여주기로 했다. ‘등골 서늘해지고’ ‘오금 저리는’ 흥행의 외줄타기를 위해 극장을 뜯어고쳤다. 무대 바로 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볼 수 있는 마니아석을 만들어 흥추임새를 낼 수 있는 자리로 고쳤다. 그리고 재야, 제도권에서 명성 자자한 명인들을 한 떼로 모은 일종의 ‘갈라’ 춤판을 구상했다.
“ 칠무전으로 하면 반편 같고, 육무전하면 육갑을 하는 것 같고, 십무전은 너무 머릿수가 많고… 역시 팔무전으로 하는 게 제일 구색이 맞지 않습니까. 병풍도 여덟 폭짜리가 가장 완벽한 것처럼. 5일간 춤으로 한가락 한다는 명무들을 관객 앞에서 맨몸으로 몰아넣겠다는 복안이죠.”
추린 팔무 명인은 임이조, 정재만, 진유림, 박재희, 이정희, 박경랑, 하용부, 김운태. 시대를 대표하는 40~60대 한창 나이의 중년 춤꾼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여 닷새 동안 연속 솜씨 대결을 하는 판을 짜게 됐다. 주류 격인 한량무 등의 사랑방춤과 비주류 격인 풍물 등의 마당춤 명인들이 같이 모인 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다. 거장 이매방류를 이어받은 진유림의 ‘승무’가 첫머리에 서고, 발디딤의 기교가 돋보이는 박재희의 ‘태평무’, 도포 차림에 커다란 부채를 들고 너울너울 장단춤을 추는 임이조의 ‘한량무’, 전립(모자)에 흰 띠를 달아 돌리면서 추는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밀양백중놀이 보유자 하용부의 ‘북춤’, 정재만의 ‘살풀이춤’과 박경랑의 ‘교방춤’, 이정희의 ‘도살풀이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질 것이다. 서로의 신경전 때문에 첫머리 승무 말고는 공연 순서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귀띔이다.
팔무 명인의 전례 없는 닷새 공연
그간 전통춤은 길어봤자 2일 공연이었다. 5일 연속 공연은 전례가 없다. 닷새 동안의 집중 무대로 기량과 흥행성을 겨루게 되므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 등의 변명이 낄 여지도 없다. 춤은 다르지만, 비슷한 연배로 맞수 구도를 형성한 임이조, 정재만 명인의 대결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악사들로는 명고수 김청만, 승무의 반주 음악인 ‘살풀이춤’, ‘한량무’의 반주 ‘시나위’의 명연주자인 원장현(대금), 박종선(아쟁), 김성아(해금)씨 등을 섭외했고, 남해안 별신굿으로 유명한 통영의 정영만 명인이 6박 구음을 한다. 그렇다면 연출은? 진씨는 표 파는 것 외에 연출은 따로 없다고 잘라 말한다.
“흥행 코드로 주목한 건 8명의 춤장인들이 분야도 다르고 만날 일도 없었다는 겁니다. 남들 다 하는 퓨전이니 하는 것에 혹하지 않고, 춤장인들을 제대로 꿰어 맞붙여보자는 정공법이죠. 발레 같은 스타 시스템이랄까요.”
전국 각지의 춤명인과 인간적 교분을 맺으며 춤기행으로 잔뼈가 굵은 진옥섭씨는 다혈질이다. 춤판에 대한 열정이 열변, 다변의 입담으로 이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버’할 때도 많다. 전통 연희에 대한 박람강기의 지식과 현대예술, 대중 관객의 취향 코드도 재빨리 읽는 순발력이 강점이다. 30여 편의 기획공연 가운데, 관련 춤만 모은 ‘여기 심청이 있다’, 고성 오광대 춤의 진수를 소개한 ‘춤의 고을 고성 사람들’, 80대 전통춤 노거장들의 갈라 공연이었던 ‘전무후무’, 풍물판 춤을 재조명한 ‘풍물명무’ 등은 명품 무대로 회자된다. 지금도 관심 많은 연극판을 실감나게 겪어보고 싶어 탈춤 등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초야에 묻힌 노령의 춤고수들과 그들의 인생사에 빠져 지금껏 그네들 삶을 발굴하고 재생하는 공연 기획에 미쳐서 살아왔다고 자기 소개를 한다. 입담꾼답게 동서고금의 춤과 예술 이야기를 두루 섞고 풍자로 비트는 진씨의 보도자료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진국’으로 정평이 나 있다. 카메라로 얼굴을 찍으려 하자, 자연스럽게 추임말이 나오고 몸동작이 촬영 모드로 조율되는 감각을 과시한다. 본능적 몸사위 속에 ‘춤판으로 대박을 잡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욕망이 묻어 있다.
“이번 춤판은 춤꾼에게는 궁지가 되겠지만, 관객에게는 축복이 될 겁니다. 가르치는 춤이 아니라 추자고 추는 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홀로 무대에 서는 춤꾼 앞에는 절대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 멋과 여백이 스며들고, 음악과 노래가 천군만마로 거들어줍니다.”
서구 스타 시스템과 레퍼토리 시스템 첫 시도
그는 인기 없던 무료 공연장 코우스를 여느 극장 못지않은 흥행 명소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팔무전 같은 대형 무대를 수년간 장기 레퍼토리화할 수 있는 전통춤 전용 소극장으로 새로 나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다. ‘돈 때문에 똥줄 타는 운명’을 거듭 자초하면서 서구 춤판의 스타 시스템, 레퍼토리 시스템을 꾸준히 정착시키겠다고 한다. 11월 그가 군산에서 찾아낸 기생 출신의 원로 춤꾼 장금도씨가 펼칠 민살풀이 무대는 그 두 번째 시금석이다. 강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춤재주가 곧 밥이라는 전통춤 본연의 ‘헝그리 정신’을 그는 앞으로도 신조처럼 새기고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공연 뒤 광대의 손에 관객의 엽전이 두둑이 쌓여야 연명했던 남사당 놀이패의 운명을 저는 사랑합니다. 밥과 연결된 춤에서 진정한 자생성이 나오거든요. 사람이 사는 만큼 예술도 사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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