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5분만 살더라도 우리 사랑하자

등록 2008-07-18 00:00 수정 2020-05-03 04:25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의 아이에게 사랑을 쏟는 공동체, 창작 뮤지컬

▣ 황진미 영화평론가

는 특이한 액자소설 형식에 특이한 내용을 담은 뮤지컬이다. 갑작스런 인생 실패를 겪은 한국 청년 ‘현우’가 우연히 캐나다 발달장애인 공동체에 봉사자로 머물면서 겪는 이야기들이 줄거리를 이룬다. 현지 장애인 부부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아기를 낳은 뒤에도 공동체 사람들과 성심을 다해 돌보는 것을 본 현우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마침내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야기다.

제작진의 안무가 코 앞에서

극중 장애인 부부와 아기 루카스에 관한 일화는 라는 기독교 에세이집의 짤막한 실화에서 따왔다. 책은 저자가 캐나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를 방문해 전해들은 일화를 약 4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뮤지컬은 이 실화에 바탕을 둔 핵심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전체 서사와 공연 구성을 모두 새로 창작한 것이다. 김수경 작가는 한국인 관찰자를 비롯한 인물들을 창작하면서, 그들에게 각기 다른 개성과 사연을 입혔다. 또한 16곡에 달하는 노래들 역시 모두 김종천 작곡가에 의해 새로 쓰였으며, 복닥거리는 공동체의 느낌이 살아나는 짜임새와 움직임은 뮤지컬 제작진의 안무에 따른 것이다.

뮤지컬 는 소극장 뮤지컬로서 국내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대극장 뮤지컬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웅장한 군무는 없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배우가 들려주는 숨소리, 노랫소리는 관객의 심장에 그대로 공명한다. 는 소극장 뮤지컬일수록 중요한 배우들의 발성과 가창력이 아주 훌륭하다. 또 좁은 공간을 극대로 활용한 배우들의 동선과 소박한 소품으로 꾸며진 무대장치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반짝인다. 특히 감정이 고조되는 악몽과 출산 장면에서 뛰어난 연출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모든 형식상의 장점들도 가 전하는 주제에 비하면 부수적이다. 뮤지컬 가 진정으로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메시지의 탁월함에 있다.

생존경쟁에서 패퇴한 현우가 ‘쭉쭉빵빵한’ 미인들 즐비한 지상낙원이라는 친구의 거짓말에 속아 도착한 곳 데이브레이크는 어떤 곳인가? 데이브레이크에 관한 첫 장면은 정말 지상낙원처럼 묘사되어 있다. 꽃과 풀과 토끼와 다람쥐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여인 산드라, 그때 등장하는 현우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하지만 곧 현우와 관객은 알게 된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미친’ 산드라의 판타지이기도 하고, 청년과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지상천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묘사되는 데이브레이크는 와글와글한 곳,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밥을 먹고 소소한 사고를 치는 현실적인 면모로 변화한다.

아버지의 노래 ‘영혼의 실을 이을 때’

이때 할머니 봉사자 수잔이 부르는 노래 가 울려퍼진다. 수잔의 노래는 현우처럼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들, 바로 우리가 밥을 먹고, 집을 치우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일상의 순환들이 어떤 고상하고 대단한 목표보다도 더 존귀하다는 것을 일러준다. 우리가 스스로 생활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을 돌보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일상의 노동들이야말로 가시적인 우리 존재를 떠받드는 기반임을 일깨워준다. 세상 사는 곳은 ‘어디든 같고, 또 어디든 다르다’. 누구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으면 그릇이 쌓이고, 그릇을 치우면 다시 배가 고파지는 순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일상의 귀중함을 모르는 자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착취하는 자이며, 한 번도 누군가를 보살펴보지 않은 자다. 현우는 그것을 모른다. 그는 그곳의 사람들이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는 식으로 특별한 목표도 없이 사는 삶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는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며 자신의 속도를 강요하기도 하고, 아기를 낳으려는 장애인 부부를 한심해하기도 한다. 그런 그도 뇌막류 질환을 지닌 루카스가 태어나고 이들 부부와 공동체 사람들이 여린 생명을 향해 쏟아붓는 사랑과 정성을 지켜보면서 바뀐다. 그들이 뭔가 부족한 존재들이 아니라, 넘치는 사랑을 지닌 자들이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현우의 깨달음, 곧 극의 주제가 가장 농축된 노래가 다. 태어나서 15분 안에 죽을 것이라던 루카스가 며칠 동안이나 기적적으로 생을 이어가자, 아버지 앤디가 불러주는 노래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실을 이어주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지… 한 사람 한사람을 소중하게 감싼 그 실은 이제 그들과 나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지… 영혼의 실을 이을 때 우리 마음은 하나가 되어간다.”

어린아이처럼 손가락 실뜨개를 하며 뱃속의 아기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던 앤디가 ‘꼭 해주고 싶은,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며 부르는 이 노래는 가장 중요한 이치인 ‘관계의 소중함’을 조용히 일깨운다.

가 그저 그런 신파극이 아닌 이유는 부부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 주제의식에 있다. 부모되기에 대한 갈망은 유산 권고에도 불구하고 무뇌증 아기를 출산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국내 영화 (2001)에도 절절히 그려져 있지만, 는 부모의 마음에 한정되지 않고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눈다. 장애라는 현실적 제약에 아랑곳하지 않는 생의 활력과 긍정을 담고 있기에 극이 더욱 빛난다.

주인공 개인사로 후퇴한 마무리 아쉬워

조금 아쉽게도 한국에 온 현우가 아버지를 만나는 에필로그는 주제의식을 다소 후퇴시키고 만다. 현우 아버지의 등장은 그간 현우가 왜 그리 까칠하게 굴었는지를 알려준다. 동시에, 앤디를 통해 알게 된 부정(父情)을 통해 자기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등 서사적 완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러한 폐곡선적인 맺음은 데이브레이크에서 있었던 풍성한 감동을 현우 개인의 서사로 함몰시키고, 주제의식마저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혹은 ‘장애인 부모를 둔 개인적 결핍의 극복’ 등으로 협소화시킨다. 현우는 관객이 데이브레이크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일종의 ‘통로’다. 그런 현우가 장애인의 아들이었다고 밝혀지는 대목에서 현우와 관객의 일체감은 약화된다.

그가 굳이 장애인의 아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를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 알리바이가 굳이 필요한가? 한국처럼 극단적 경쟁심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특별한 감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리다 패퇴한 ‘마초’ 남자라면 (현우처럼 대놓고 공격적이진 않더라도) 장애와 보살핌에 대한 미성숙한 의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냈을 것이다. 극중 현우의 모습에서 좀 ‘오버스러운’ 행동들 대신 ‘평균적인’ 마초성을 적당히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하고, 반전인 양 주어진 에필로그를 생략했다면? 그랬다면, 가 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과 이에 대한 반성적 울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소 아쉽다. 8월31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나무와 물. 문의 02-741-9091.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