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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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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죄는 그들의 선택

등록 2008-07-11 00:00 수정 2020-05-03 04:25

지금 한국 여성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과거보다 훨씬 솔직하게 그려낸 와

▣ 강명석 문화평론가

영화 의 캐리(세라 제시카 파커)는 친구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이 입양한 딸에게 를 읽어주며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현실은 이렇지 않단다.” 뉴욕에서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단맛 쓴맛 다 보고 자기 능력으로 비서에게 루이뷔통 가방을 사주는 이 ‘칙릿’의 우상에게 는 지나간 동화다. 그러나 한국방송 에서 는 도전해야‘만’ 하는 신화다.

지나간 동화와 도전해야‘만’ 하는 신화

(KBS2, 수·목 밤 9시55분)에서 도영(김지수)은 다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원더우먼쇼’를 진행하고, 그 와중에 제작진의 막내 생일까지 챙기는 ‘원더우먼’이다. 그러나 ‘여대생이 가장 닮고 싶은’ 원더우먼의 내면에는 언제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갈지 몰라 불안한 신데렐라가 있다. 도영은 자신을 질투하는 동료 시은(김혜은)에게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대해 강변한다. 하지만 도영은 신데렐라가 될 수 있었기에 원더우먼도 될 수 있었다. 도영은 부유한 정희(정애리)에게 입양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다시 잃어버릴까 무서운’ 그 자리를 지키려고 정희의 친딸 사월(이하나)을 서울역에 버렸다. 원더우먼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데렐라부터 돼야 한다는 도영의 모순적인 상황은 사월의 말대로 이 세상에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영과 사월이 명품 매장의 VIP와 직원인 것은 여성 시청자를 위한 눈요기용 설정만은 아니다. 명품 드레스를 사는 사람과 입혀주는 사람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들 부모의 신분이다. 많은 여성들이 ‘한정 신상품’을 원하지만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사월의 친구 용자(하재숙)도 부모가 준 재산 때문에 사월보다 훨씬 덜 노력하고도 이미 자기 집을 갖고 있다.

는 그 한정된 세계에 선택받지 않은 여성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선택을 보여준다. 도영은 자신이 선택받기 위해 사월을 버렸고, 어떤 여자는 대기업 회장의 애첩이 된다. 명품 쇼핑백을 든 채 도영에게 돈 많은 남자를 소개해달라고 하는 시은의 모습은 허영에 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시은에게 도영과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명품을 두르고 맞선 시장에서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여성의 성공을 위한 이상으로 원더우먼이 제시되지만, 원더우먼은 타고난 ‘공주’ 아니면 신데렐라 중에 나오는 현실.

물론, 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도영은 자신의 원죄로 인해 결국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고, 사월은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부터 스스로의 노력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는 도영의 몰락 속에서 악녀가 돼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고픈 여성의 욕망을 주목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데 그 세계에 들어갈 수조차 없을 때,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원더우먼쇼’의 작가 은비(장영남)는 신춘문예에 당선했고 연극 무대에도 올랐던 재주 많은 여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도영과 달리 신데렐라의 길을 포기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실력과 관계없이 명품을 입을 수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없다.

꿈도 인생도 출신성분 앞에선 보잘것없네

를 집필하는 김인영 작가는 과거 과 등에서 재능과 노력만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것은 외환위기를 전후로 자신만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여성들의 꿈을 반영했다. 그러나 는 그 꿈마저 사라지고 여성의 인생이 부모의 배경 앞에서 보잘것없는 종속 변수가 된 지금 이 시대 여성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것은 가 출생의 비밀을 다룬 과거의 트렌디 드라마와 차별화되는 부분이자, 사월이 아닌 도영의 내면을 더 깊게 파고드는 이유다.

자신의 꿈과 능력을 100% 펼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라이벌이 될 만한 여성들을 지능적으로 제거하며, 동시에 신데렐라가 될 기회를 잡을 노력까지 하는 도영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으나, 차마 떨쳐낼 수는 없는 현대 여성의 어떤 일면이다. 그것은 마치 의 준혁(김명민)이 옳은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남성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라는 제목은 어쩌면 영화 의 여성 버전이라는 뜻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양처럼 단 한 명의 여자만 가질 수 있는 인생을 원한 여자, 그러나 그 기회조차 잡지 못했기에 의 알랭 들롱처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여자의 비극.

그러나 의 진정한 묘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영이 결국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시은은 “모든 것을 가졌다”며 도영을 질투한다. 하지만 도영은 정희의 친딸이 되지 않는 한 어느 것도 마음 편히 가질 수 없다. 설사 그가 비밀을 지킨다 해도, 그는 정희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증과, 그것을 원하는 만큼 채워주지 못하는 연인 준세(한재석)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문화방송 (MBC, 토·일 밤 10시35분)에서 혜진(오연수)이 늘 위태로운 인생을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혜진은 돈 많은 남편 동원(정보석)과 함께 살지만, 자신이 동원에게 진정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혜진은 준수(이동욱)와 불륜 관계에 빠지면서 사랑에 대한 설렘을 얻지만, 대신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돈과 사랑을 모두 얻고 싶어하지만, 바깥에서 바쁘게 돈을 버는 남편은 자기 스스로 “돈은 주지만 사랑은 주지 않는 남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혜진의 불륜은 혜진이 결혼 뒤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도영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죄’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한 과정이 되는 것과 같다.

이분법을 넘어 여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다

누구도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는 인간의 공허함을 드라마로 표현하려는 과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설정들을 솜씨 있게 변주하는 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그러나 두 작품은 모두 지금 한국 여성이 겪고 있는 딜레마를 과거보다 훨씬 솔직하게 그려낸다. 에서 샬롯의 딸은 신데렐라가 없는 세상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를 보며 캐리의 인생을 꿈꾸던 서울의 여성들은 도영처럼 자기 스스로 신데렐라라도 되지 않으면 야심도 가질 수 없고, 혜진처럼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평범한 주부가 경제력을 갖기도 어렵다. 원더우먼이 되기 위해 신데렐라를 꿈꾸고, 사랑과 안정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줌마렐라’가 어쩌면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일 수도 있는 여성들의 딜레마. 그건 여성의 탐욕이나 불가해한 심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가 여성의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순간, 여성은 착한 여자와 악한 여자의 이분법을 넘어 여성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자는, 여자다. 신데렐라도 원더우먼도 아니고, 때론 그 양쪽을 모두 가져야 살 수도 있다. 드라마가 그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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