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유럽축구선수권의 승자 스페인, 젊은 미드필더와 최고령 감독이 빚은 끈끈한 승리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뿔 달린 소가 투우장에 나온다. 24시간 어둠에 갇혀 있다 풀려난 소는 느닷없이 눈으로 들이닥치는 햇빛에 당황한다. 자, 이제 투우사가 등장한다. 그는 진정하지 못하는 소를 빨간 헝겊으로 슬슬 약을 올린다. 소가 그곳으로 달려들면, 투우사는 헝겊을 슬쩍 제치며 저만치 지나쳐버린 소의 뒤꽁무니를 비웃듯 바라보는데, 소는 또 어느새 저쪽에서 빨랑거리는 빨간 헝겊에 심통이 나서 달려든다. 하지만 투우사는 여유작작, 혹은 호기로운 표정으로 또 쓰윽 소를 제친다. 흥분한 소는 그렇게 제 풀에 지쳐가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창을 끝내 받아들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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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팀을 어떻게 이겼던 걸까
2008 유럽축구선수권(유로2008)에서 스페인 축구를 본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은 “스페인 축구는 마치 투우와 같다”고 했다. 이 대회 4강에서 스페인에 0-3으로 진 거스 히딩크 러시아 대표팀 감독은 “스페인은 ‘원 터치 축구’(동료가 건넨 공을 바로 또 다른 동료에게 패스)로 우리를 많이 뛰게 해 의도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스페인은 승리할 자격이 있는 팀”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선수들은 늘 공에 끌려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스페인은 간결한 패스로 공을 향해 달려드는 상대를 따돌리고, 여기저기 공을 쫓아다니다 상대가 지친 틈을 타 순간적인 역습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독일과의 결승전에서 스페인의 공수를 조율하는 미드필더 사비 에르난데스(FC바르셀로나)는 62개 패스 중 87%의 패스 성공률로 동료 발에 공을 먹기 좋게 갖다줬고, 러시아와의 4강전에서 스페인 선수 전체는 572개 패스 중 463개 패스를 실수 없이 전달했다는 걸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스페인은 가장 기본이라지만 가장 어려운 ‘패스축구’(또는 기술축구)를 앞세워 지난 6월30일 끝난 유로2008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스페인은 늘 우승 후보로 불렸지만, 늘 후보에 그쳤다. 1964년 이 대회 우승 이후 월드컵 등 메이저 대회 우승 경험이 없던 팀이 ‘무관의 제왕’ 꼬리표를 결승전이 열린 오스트리아 빈에 떼놓고 온 것이다.
이즈음에서 새삼 이런 물음을 해본다. 6년 전, 우린 이 팀을 도대체 어떻게 이겼던 걸까? 연장까지 이 팀에 어찌 한 골도 내주지 않을 수 있었나?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은 스페인을 맞아 0-0으로 버틴 뒤 승부차기에서 이겨 4강행을 이뤘다. 그때도 스페인은 패스축구의 팀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코치였던 최진한 동북고 감독은 “압박으로 패스의 길목을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팀의 압박이란, 상대한테 2명 때론 3명이 달라붙어 포위했던 것을 말한다. 어떻게든 그 포위망을 뚫고 패스가 되면, 또다시 다른 2명이 그쪽으로 달려들어 방어망을 친 것이다. 상대보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으면 못할 일이다. 세계적인 클럽(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과 세계적인 리그(프리메라리가)를 갖고도 스페인이 큰 대회에서 중도하차했던 건 길목이 막히면 경기가 막히는 패스축구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득점왕 비야와 결승골 토레스의 포옹
그럼 유로2008에선? 최 감독은 “스페인은 (세나, 실바, 사비, 이니에스타, 파브레가스 같은) 미드필더들로 미드필드에서 수적으로 우위를 점하며 패스로 풀어가는데, 당시보다 젊어진 미드필더들의 패스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고 했다. 체격적으로도 다른 팀을 압도하지 못하는 스페인이 상대와의 몸싸움으로 힘을 빼기 전에 빠른 패스워크로 경기를 풀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브라질에서 귀화한 마르코스 세나(비야 레알)가 수비형 미드필더인지, 공격적인 선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포지션을 파괴하며 폭넓게 움직인 건 스페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한-일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눌러 공략법을 잘 알고 있는 히딩크 감독이 이번엔 러시아를 이끌고 스페인을 만나 조별 리그에서 1-4, 준결승에서 0-3으로 진 건 강해진 스페인 축구를 증명하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빠르기만 하면 과열된 엔진이 타버린다. 경기 흐름을 조절하는 ‘야전지휘관’ 사비와 (교체 멤버로 뛴) 파브레가스를 가진 건 스페인의 행운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뚜렷한 지휘관을 갖지 못한 체코와 프랑스가 조기 탈락한 것과 대조된다. 유럽축구연맹 기술위원회의 앤디 록스버그 위원장은 최우수선수(MVP)에 뽑힌 사비에 대해 “높은 볼 점유율, 패스 능력, 야금야금 전진해 어느 순간 상대 진영으로 파고드는 침투력으로 대변되는 스페인 축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선수”라고 했다.
그 축구의 마지막 점을 찍은 게 다비드 비야(발렌시아)와 토레스(리버풀)였다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이번 대회 최고령(70살)이었던 아라고네스 감독은 스페인 축구의 상징 라울 곤살레스(레알 마드리드)를 2006년 10월 유로2008 예선 스웨덴전 0-2 패배 이후 빼버렸다. 라울은 A매치 102경기에서 44골을 넣은 골잡이였으니, 감독의 선택은 팬과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러나 감독은 스페인 2부 리그에서 1부로 올라와 리그 7년간 129골을 넣은 다비드 비야,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24골을 넣은 토레스 같은 20대 젊은 골잡이들의 과감한 돌파력과 문전에서의 집념을 굳게 믿었다. 골감각은 탁월하나 동료들이 밥상을 차려줘야 하는 라울보단, 직접 밥상을 차려낼 수 있는 비야와 토레스를 신뢰했다는 것이다. 비야는 대회 득점왕(4골)에 올랐고, 토레스는 결승전 결승골로 화답했다.
특히 러시아와의 조별 리그 1차전에서 비야가 해트트릭을 작성한 뒤 이미 교체돼 벤치로 돌아간 토레스를 향해 뛰어가 포옹한 장면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이날 비야의 첫 골은 골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을 건네준 토레스의 패스 덕이 컸다. 벤치로 물러난 동료를 찾아가 껴안은 뒤 “해트트릭을 토레스에게 바친다”고 한 비야의 말은 스페인의 끈끈해진 분위기를 웅변해준다.
대한축구협회에선 기술부장 혼자 관전
그간 스페인은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소속 선수들 간의 알력과 갈등이 대표팀의 결속을 해치는 요인이 아니냐는 시선도 받아왔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카스티유 지방의 마드리드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 역사적으로 충돌을 빚어온 지역이다. 그런 지역 갈등은 자국 리그 축구 경기로 스며들어 더욱 커졌고, 두 팀 간의 경기는 뜨거운 자존심 대결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감정이 대표팀까지 이어져 한 덩어리로 뭉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는데, 이번 대회 직전과 대회 도중에는 그런 잡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라고네스 감독이 라울이란 짙은 그림자를 지워내고 골키퍼 카시야스에게 주장 완장을 채운 것도 ‘양보와 신뢰의 팀’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카시야스는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지만, FC바르셀로나 선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베테랑이어서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이다.
아라고네스 감독은 이 대회를 끝으로 스페인 대표팀 지휘봉을 놓았고, 스페인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에 올라섰다.
가장 기본이라는 패스는 그 공을 받아줄 수 있는 공간으로 빨리 뛰어가 기다려주는 동료의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한 축구 기술이다. 상대에게 포위된 동료의 고립을 풀어주는 유일한 방법도 땀을 흘려 그 근처로 달려가 패스를 받아주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장면을 대한축구협회가 딱 한 명의 기술부장만 보내 보게 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일본은 8명의 지도자를 보내 세계적인 축구 흐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 축구 설계 자료로 활용하겠다고 했다니 아쉬움이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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