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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현이 사랑받으면 내가 기분이 좋다”

등록 2008-07-04 00:00 수정 2020-05-03 04:25

의 곽재용 감독… 왜 그의 영화에서는 유약한 남성이 강한 여성의 사랑을 받을까

▣ 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뭐 이런 애가 있나. 소주는 사발로 ‘원샷’을 하고, 차력대회에 나가서는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불타는 숯을 맨발로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신다. 그뿐이랴. 머리 위로 망치가 떨어져도, 자동차에 치여 튕겨져 날아가도 눈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다. 곽재용(49) 감독의 영화 은 이렇듯 소휘(신민아)의 범상치 않은 무공에서 시작된다.

무림의 4대 장로 중 한 사람인 갑상(최재성)의 외동딸 소휘는 무림 최고의 기대주.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오토바이 탄 왕자님 준모(유건)에게 반한 뒤 무술을 포기하고 조신한 여대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갑상은 수백 년 동안 무림 세계를 지켜온 가문을 위해 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만 “이제는 여자처럼 살고 싶다”는 소휘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그사이 무림의 비검인 월영검을 훔쳐 달아났던 어둠의 세력 흑범(정호빈)이 나타나 갑상을 해하고, 이에 소휘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다시 칼을 잡는다는 것이 이번 영화의 기본 뼈대다. 물론 ‘캐발랄 로맨틱 액션 코미디’라는 카피처럼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흥겹다. 데뷔작 에서부터 (이하 ) 등을 통해 줄곧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해온 곽재용 감독을 만나, 무협영화를 들고 온 이유부터 물어봤다.

왜 무협액션인가.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하고 싶었던 장르다. 학창 시절 이소룡 팬이었다. 쌍절곤을 들고 다니면서 이소룡 영화를 보러 다니고, 태권도 선수권대회에도 나갈 정도로 무술을 좋아했다. 영화 하면서 학창 시절의 그런 아련한 기억들을 꺼내보고 싶었다.

개봉을 2년이나 미뤘던 이유는?

=작업 끝내놓고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을 좀 꼼꼼하게 하다가 개봉 시기를 놓쳤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1년이다. 또 준모가 짝사랑하는 인물로 나오는 여순경(임예진)의 역할을 조정하다 보니 다시 1년이 흘렀다. 영화 찍을 때만 해도 유건과 임예진의 로맨스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2년을 보내면서 임예진이 누나보다는 아줌마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둘의 로맨스가 2년 전과 같지 않아 코믹하게 재편집했다.

처음으로 무협영화를 찍었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

=무협영화도 멜로영화 찍듯이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장비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획을 달리했을 것이다. (웃음)

영화 속 현실 세계는 밝고 가볍지만, 무림 세계는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 영화가 두 개로 분리된 것 같은데.

=무림 세계는 아버지들의 세계고 현실 세계는 자식들의 세계다. 죽어가는 무림 세계에 딸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편입되면서 무림 세계가 되살아나고 밝아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세대 간의 단절과 소통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어둡게 설정했다.

후반부에 소휘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보리밭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일반 무협영화처럼 진지하거나 비장하게 그려지지 않고 흥겹고 발랄하더라.

=배급사에서 잘라달라고 한 장면이다. 복수하러 가는 애 맞냐고. (웃음) 그런데 촬영하면서 신민아에게 그런 소녀적인 느낌을 일부러 주문했다. 그게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다. 촛불집회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싸우러 나온 여중생, 여고생들 얼마나 발랄하고 유쾌하냐. 옛날에는 싸울 때 엄청 심각했다. 이들은 투쟁의 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런 요즘 아이들의 발랄한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이번에 오락실 사장 역으로 깜짝 출연했다.

=와 에도 출연했다. 때는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사람으로 나왔고, 에서는 과거 판타지 장면에 나온 적이 있다. 매 작품마다 단역으로 출연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원칙도 있다. 옷을 갈아입거나 분장을 하지 않고 항상 촬영장 모습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관객은 내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웃음)

이번 영화를 보면 전작을 상기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비 오는 날 남녀 주인공이 옷으로 비를 가리며 뛰어가는 장면이라든가, 차태현과 임예진의 등장, 그리고 에서처럼 1인다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게 그것이다. 전작에 대한 오마주인가.

=딱히 그렇지는 않다. 비가 오고 우산이 없는 상황은 그냥 내가 영화에 꼭 넣고 싶은 장면이다. 거의 모든 작품에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장면이 좋다. 차태현은 워낙 친해서고, 임예진은 에서의 배역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출연한 거다. 1인다역은 경제적인 효과도 있지만 같은 사람이 다른 역으로 등장하면 장면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다. 자칫 밋밋하게 지나갈 장면을 기억하게 만드는 효과가 크다. 그래서 종종 사용한다.

모든 작품을 통해 한결같이 첫사랑, 소년소녀의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랑은 처음으로 찾아오는 사랑이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첫사랑 뒤에 찾아오는 사랑은 변질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첫사랑에 대한 상처 때문이다. 중년의 사랑은 자칫 불륜과 섹스로 빠질 수 있어 위험하다. 첫사랑의 설렘과 생동감, 그리고 가슴 시린 추억,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감수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상상이다. 나는 어린 시절 성장이 늦었다. 친구들이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질 때 나는 같은 책을 보면서 가슴 아파한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실제로 사랑을 못하다 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상상한 것 같다. 실제로 사랑을 많이 해본 사람은 영화를 안 만든다. 사랑하느라 바쁘지.

매 작품마다 등장하는 여성상과 남성상이 같다. 여성은 밝고 강한 데 비해 남성은 조금 약해 보이지만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맞는 지적이다. , 그리고 이번에 일본에서 개봉한 에서도 그렇다. 어머니께서 의 견우(차태현)를 보시며 “꼭 너 보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나는 내게 부족한 남성성을 영화를 통해 채워넣는다. 그 방법은 진정한 마초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초성이 부족한 남자들을 등장시켜 그들을 사랑받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객, 특히 나와 같은 사람들의 공감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마초성이 부족한 남성들이 사랑받는 것을 좋아한다. 차태현이 사랑받으면 내가 기분이 좋다. (웃음)

이번 작품에서 ‘살짝’ 변신을 꾀했지만 앞으로 ‘곽재용표’ 로맨틱 코미디 또는 멜로를 기대해도 되나.

=한계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의 요구가 있다고 제작자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객의 요구가 없으면 그런 영화를 못 만든다. 나도 변화를 해야 할 시간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아직도 가 인기를 누리듯이 그런 멜로에 대한 수요가 있다. 해외에서는 시간이 좀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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