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서우진의 특종과 방송 3년차 사건 기자의 ‘삽질’
▣ 김혜은(가명)·3년차 방송기자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3년차 방송사 사건 기자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남들은 알까? 9시 뉴스용 기사를 써본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어제 회식 때 마신 폭탄주가 채 깨지 않은 아침. 기자실에 비몽사몽 앉아 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피할 수 없는 ‘캡’(서울경찰청에 출입하며 사건 기자들을 지휘하는 고참기자)의 전화가 걸려온다.
‘다방 마와리’를 도나
캡: 뭐하나.
나: 아, 예… 형사과장실에서 과장과 이야기 좀 나누고 있습니다. (영상통화가 보편화되면 참말로 큰일이다. 어디 있는지 더 이상 거짓말이 안 통할 텐데.)
캡: 그놈의 형사과장은 매일 만나면서 기사 하나 안 나오나! 만나서 잡담만 하나! 오늘은 기필코 센 기획 아이템이나 고발 기사 하나 물어올 것으로 믿고 있겠다. 오늘 저녁 아이템 회의 전까지 내 인트라넷 개인 게시판에 올려라. (툭)
경찰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만 있는 것은 밥벌이의 윤리에 어긋나는 짓인 것 같아 일단 경찰서를 나서본다. 하지만 오늘은 또 어딜 가서 기사를 찾아봐야 하나. 경찰서 네 곳에 대학 세 곳, 시민단체 사무실과 검찰, 법원까지 ‘나와바리’(정해진 취재구역·기자들 사이엔 일본식 용어를 그냥 쓰고 있음)는 광활하나 마음은 막막하다.
그래, 나도 의 서우진처럼 ‘특종’하고 싶다. 서우진이 탈주범 장진규에 대한 제보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다방 마담. 다방 마담의 전화가 걸려오자 일단 “어, 김 마담”이라고 부르고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간다. 도대체 어떻게 다방 마담을 취재원으로 만든 거지? 다방 ‘마와리’(취재구역을 돌아다니며 취재원을 만나는 일·역시 일본식 용어)라도 돈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얄밉게도 자신의 영업 노하우는 알려주지 않고, 그 결과만을 보여준다. 결과란 것은 ‘다방 마와리’보다 더 기이한 다방 레지로의 위장 취재와 장진규와의 대면… 그리고 특종.
뉴스에 나오지 않으니 남들은 내가 노는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다만 ‘삽질’을 하고 있을 뿐. 그제는 사고 난 택시 차량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고 대충 외관만 수리해 다시 사용하는 택시회사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드디어 잡았다’ 싶어서 몰래카메라까지 들고 출동했다. 하지만 허위 제보였다. 어제는 어린 시절 친척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지만 아무 말 못하다 이제는 공소 시효가 지나버린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하기로 했다. 2주 동안 설득해 인터뷰 시간을 잡아놨던 건데, 방송에 얼굴이나 목소리가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며 급작스레 인터뷰를 취소했다. 신문 기사라면 모를까 방송은 절대 안 되겠단다. 사례를 ‘보여줄’ 수 없으면 방송은 기사를 쓸 수 없으니까 ‘킬’(취재를 접는다는 뜻의 기자 은어). 킬. 킬이다.
오후 4시. 몇 시간 뒤면 아이템 회의인데, 특종은커녕 ‘면피용 아이템’(이러저러한 것을 취재하고 있다고 캡에게 보고하기 위한 용도의 기사거리)조차 구하지 못했다. ○○○ 동료에게 전화를 한다.
나: 야, 뭐 좀 찾았냐.
○○○: 있겠냐. 넌 있냐.
나: 있겠냐. 에휴. 야, 오태석 캡은 서우진한테 특종거리를 퀵으로 보내주더만, 우리 캡은 왜 들들들 쪼기만 하는 거냐.
○○○: 너도 서우진처럼 예쁘게 생기면 캡이 퀵으로 특종 보내줄지도 몰라, ㅋㅋ.
나: 전화 끊자-_-
그래, 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잔인하지만, 대형 사건사고가 터져주는 수밖에 없다. 속보가 이어지는 대형 사고를 취재할 때는, 비록 타사와의 경쟁에서 ‘물’(타사에 특종보도를 뺏기는 일)먹지 않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지만, 적어도 기획 아이템에 대한 압박은 없으니까.
오호, 절박하게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더니, 중국에서 지진이 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1만 명이 죽었다는데 보도국은 야단이 났다. 덕분에 일단 오늘 아이템 회의는 미뤄진데다, 중국에 취재를 갈 지원자도 모은단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은 캡이 아이템을 올리라고 쪼지도 않을 테고,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사건을 취재하는 경험도 쌓을 테고, 현장에서 구르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사건 기자의 변태적인 취향까지 딱 부합하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중국 현장에 가기로 결정된 기자들은 모두 남자다. ‘되도록 남자 기자’를 보내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는 말도 들린다. 여기자를 보내기엔 너무 거친 현장이라서? 아니면 취재 능력이 떨어져서? 서우진이라면- 설령 본인이 원치 않았어도- 모든 기자들을 제치고 현장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변장한다면 보험 아줌마?
여기자가 크게 늘면서 여기자에 대한 차별은 거의 사라졌다지만, 가끔은 이렇게 벽에 부딪힐 때도 있는 법. 하지만 난 서우진이 아니니까. 게다가 서우진은 지나치게 예쁘니까. ‘다방 레지’로 변신해 탈주범마저 무장해제시킬 정도니까. 아마 나는 설령 다방 마와리를 돌아서 친해진 마담이 제보를 줬다 한들, 탈주범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방 레지로 변장해도 들통이 안 날 외모가 아니니까. 아마 보험 외판원 ‘아줌마’ 정도로는 변신할 수 있었겠지? 기사거리라도 찾아보려고 형사들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비타500을 건네며 괜히 친한 척 말을 붙이려는데, 보험 팔러온 ‘아줌마’인 줄 알고 ‘일없다’며 내쫓으려던 형사도 있었잖아?
오늘도 아이템 회의에서 꿀 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던 나는 회식 때도 제발 저려 조용히 술만 들이킨다. 직장 3년차에 사표도 많이 쓴다던데, 이렇게 우울한 하루를 살면서 그럼에도 기자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확실한 건 우진이나 명은이 그렇듯 앵커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라는 것.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특종은 아니더라도,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당하고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은 기사로 대신해줄 수 있으니까, 뻔뻔하게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기사로 고발할 수 있으니까. 매일매일 삽질에 지치다가도 아주아주 가끔 그런 기사를 썼을 때 느끼는 뿌듯함 때문에, 그 중독성 강한 뿌듯함 때문에, 나는 조만간 다시 기사를 찾아내 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으리라 믿으며, 화장도 지우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잠을 청한다.
*문화방송 수·목 밤 9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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