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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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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극의 매혹은 계속된다

등록 2008-05-23 00:00 수정 2020-05-03 04:25

복잡미묘한 관계의 풍경 와 미시적으로 복원한 재일교포 사회의 단면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종종 대화를 끊는 침묵과 고민스런 행간, 폭포처럼 뿜어져나오는 몸짓과 절규. 인간 군상들이 빚어내는 양극단의 정서를 뽑아내며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일본 연극의 매혹이 수년째 국내 연극판의 눈길을 부여잡고 있다. 우리 연극판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일본극의 매혹은 올해도 어김없이 계속된다.

태엽 장치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의 목소리와 몸짓

“벌써 공연이 시작된 거야?” 자리를 잡으려는 관객이 수군거린다. 아직 공연 시간이 안 됐는데, 무대 위 의자에 벌써 배우들이 앉아 관객을 기다리는 기묘한 상황이다. 공연 직전 어두워지는 통과 절차도 없다. 그냥 시간이 되니 기다리던 배우들이 나직이 일어나 대화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지난 5월12일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마지막 무대를 올린 극단 파크의 (박광정 연출)는 섬뜩함을 숨긴 평온한 일상의 가시를 보여주는 무대다. 일본의 저명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 원작의 를 각색한 이 작품은 3차 대전으로 유럽이 쑥대밭이 된 2014년의 음울한 미래가 잔잔한 하루로 흘러간다. 베르메르 등 거장의 미술품들이 난리를 피해 옮겨오면서 서울의 작은 미술관에서 17세기 명화전이 열린다. 그 미술관에 구경온 ‘장삼이사’들이 만들어내는 한나절이 극을 채운다. 미술관에서 가족모임을 약속한 사남매, 그들 시누이를 지켜보는 올케, 유럽에 평화유지군 파병을 앞두고 마지막 데이트를 하는 군인과 애인, 얼마 전 선을 본 서먹한 남녀들…. 그들이 무대에서 뒤섞여 각기 자신들의 사연들을 나긋이 풀어놓지만, 서로의 대화는 수시로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고 삐끗거리며 긴장감을 낳는다. 남편의 외도에 파탄나기 직전인 가정 상황을 담담히 시누이에게 털어놓는 올케, 유럽 전선에 평화유지군으로 참전하려는 젊은이와 애인이 나누는 불안하고 애틋한 시선 따위 등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은 전시장 공간에서 모두 자기만의 시각과 생각으로 세상과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마치 도돌이표가 붙는 돌림노래처럼 어우러지면서 복잡미묘한 관계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등장인물 16명의 이야기들은 치밀한 태엽 장치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풀려나간다. 공연 뒤에도 배우들은 무대인사를 하지 않는다. 바깥의 문 앞에서 도열해 관객을 환송했다. 그 뒤 일상처럼 무대장치와 집기들을 정리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근처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했다. 마치 숨쉬듯 연기 장인들의 행위가 펼쳐졌다. 연극의 뿌리 격인 떠들썩한 제의가 아니라 소박한 일상 행위의 한 과정으로서 자리잡는 연극. 관객 김민지씨는 “자신의 행동을 거울처럼 비추는 연극적 메커니즘에 종이가 조금씩 젖는 듯한 교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연출가 박광정(극단 파크 대표)씨는 “이라크전이 발발했던 2003년 초연 당시엔 많이 낯설게 비쳐졌다. 그러나 지금은 관객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전했다.

일본 문제작들, 올 상반기부터 줄을 이어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선보일 한·일 연출가와 배우들의 공동 제작물 (5월20~25일)은 시대 배경과 구성이 독특하다.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열린 1970년을 전후한 2년여간 오사카 인근 간사이 지방의 재일동포 마을에서 곱창집 ‘야키니쿠 드래곤’을 운영한 동포 가족의 일상을 그대로 떠놓았다.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과 일본 신국립극장 개관 1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공연의 원작은 동포작가 정의신씨가 쓴 작품. 정씨와 촉망받는 청년 연출가 양정웅씨가 연출도 같이 하고, 한·일 양국의 정상급 배우들이 합동 출연한다. 딸들의 결혼과 취업, 교육, 북송, 우토로 투쟁을 연상시키는 당시 재일동포들의 국유지 불법 점거 논란 등 현실의 문제들이 날것 그대로 등장한다. 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 한국말과 간사이 사투리가 뒤섞인 떠들썩한 무대는 오히려 낯설다. 지금 오사카 한인타운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아니라 동포들이 심하게 차별받던 열악한 시기의 공간, 그때의 말투와 몸짓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배우, 스태프들이 오사카 현지답사까지 한 이 합작극은 당대 제일동포 사회의 단면을 미시적으로 복원하는 풍속 다큐멘터리극이란 점에서 처음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17~27일 일본 신국립극장 공연에서는 기립박수와 언론의 대대적인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주제의식과 구성이 돋보이는 일본의 문제작들은 올 상반기부터 줄을 이었다.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환운동에 나섰던 피아니스트의 옥살이 사연을 다룬 사카테 요지의 작품 (산울림 소극장)는 보기 드문 일본의 참여연극으로 눈길을 모았다. 대학의 생명과학 연구실을 배경으로 생명윤리와 인간의 본질을 되묻는 (아르코예술극장), 일본 소장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를 정신과 의사와 환자들의 에피소드로 재치 있게 각색한 등도 대화의 기술이 돋보이는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올 10월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연출 대가인 스즈키 다다시가 한국 배우들과 함께 아르코예술극장과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그리스 비극 를 올린다. 그리스 비극을 통해 전쟁에 얽힌 무의식적 기억을 몸의 언어로 표출한다는 틀거지가 눈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연극이 한국과의 교류를 본격화한 것은 90년대 중반 이래 10년이 넘었다. 특히 2002년, 2005년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공동연출·공동출연으로 기획한 히라타 오리자, 김명화 작 가 일본 연극 열풍의 촉매제가 됐다. 서울 어학당에서 한국말을 배우는 일본인들의 소풍 풍경을 잔잔히 담은 합작극은 당시 양국의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이후 동포 소설가 유미리 원작의 , 마쓰다 마사타카 원작의 , 일본극단 1980의 등 매년 10편 안팎이 공연 중이다.

쩌렁쩌렁하지 않은 ‘생활의 발견’

일본 연극이 별식으로 환영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1910년대 태동한 신파극의 원조이자, 우리 땅에 근현대 연극을 전해준 곳이란 인연도 무시할 수 없을 터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쇼처럼 가벼워지고 오락성을 의식한 한국 연극판 흐름에 대한 식상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형만을 찾는 연기, 쩌렁쩌렁한 발성 같은 기존 사실극과는 또 다른, ‘생활의 발견’을 내세우는 연출도 신선하게 비쳐졌다. 월간 의 최윤우 기자는 “가벼운 뮤지컬류가 대학로 공연의 절반을 넘고, 코미디 등에 초점을 맞추는 획일적 흐름 속에서 일상과 현실의 미세한 단면에 주목하는 일본극의 흐름이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라며 “가벼워진 연극판의 분위기에 대한 성찰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연극은 90년대 이후 무대 배치, 연기법 등에서 다양한 층위의 표현언어를 계속 축적해왔다. 동포 연출가 김수진씨가 이끄는 극단 신주쿠 양산박의 대표작 처럼 신비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코드가 있는 반면, 등 조용한 일상 연극들도 다른 흐름을 형성해왔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문화 교류에 거부감 없는 젊은 세대들이 대거 관객층으로 부상했지만, 정작 공동연출·공동출연 등의 합작극 흐름을 통해 국내 연극계 내부에서 눈에 띄는 교류 성과를 축적했는지는 의문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연출가 박광정씨는 “국내에서 일류를 형성한 일본 연극이 몸짓과 대사를 전달하는 극작술과 표현력 등에서 국내 연극보다 훨씬 진폭이 넓다는 점을 우리 연극인들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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