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가 박경리 선생께 드리는 추모사… 토지문화관에서 배추를 키우고 짠지를 담그던 그 따스한 손
▣ 백가흠 소설가
나는 토지문화관에 4개월씩 두 번, 8개월을 살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낸 단편집 전부, 두 권을 토지문화관에서 탈고했다. 작가의 말 끝에 ‘토지문화관에서’란 말을 꾹꾹 두 번 눌러 적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고마움의 표시 전부였다. 첫 책을 만들러 나는 원주 토지문화관으로 기어들어 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채 토지문화관 마당을 서성일 때가 많았다. 미명이 천천히 밝아오고 새들이 하나둘 아침을 알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곤 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마주 보고 선 산 능선의 평화로움이 확연해졌던 어느 날 새벽, 박경리 선생님을 처음 보았다. 토지문화관 창작실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지난 뒤였다. 선생댁 마당에는 혼자 일구기엔 꽤 넓은 텃밭이 있었는데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고 계셨더랬다. 그 넓은 텃밭을 혼자 일군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이른 새벽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배추벌레 잡으세요? 저 넓은 밭의, 배추의 배추벌레를 다요? 손으로요? 밭에서 일하는 거 창작실에 와 계신 선생님들이 보면 부담 갖는다고 안 들키려 새벽에 주로 밭일하세요?’
손수 정성을 다해 농사짓고 만든 음식을 후배 작가들에게 먹이시는 친할머니 같은 자상함에 감동받은 것도 물론이었지만 선생이 내민 배려가 마음속 깊이 울림으로 남았다.
드린 게 담배뿐이라니
토지문화관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작가 개인에게 자율성이 보장되지만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밥시간이다.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고통스런 밤을 보낸 이들의 침묵으로, 또 어느 방에 모여 밤새 취한 숙취로 하루를 여는 점심시간, 어느 날 선생님이 그릇에 음식을 담아 식당으로 내려오셨다. “밥 먹는 데 신경쓰일까 잘 안 내려오는데, 단지를 헐다 꼭 먹이고 싶어서….” 선생님이 들고 있던 쟁반에는 각종 짠지들이 얹혀 있었다. 무짠지, 고춧잎, 콩잎 등등.
“밥은 입에 맞나 몰라 항상 걱정이고, 어쨌거나 편안하게, 맘 편하게 있다 가세요. 여서 뭘 많은 걸 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푹 잘 쉬고, 일은 돌아가서 해도 되고. 하이튼 여기서는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잘 먹고 잘 쉬고 가면 돼요. 그 바람뿐이고….” 선생님이 쟁반을 식탁에 내려놓고 수줍게 웃으셨다. 선생님이 내려놓은 짠지, 정말 짠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미루고 미루었던 일을 해치우려 고향에 내려갔다. 여름방학 내내 홍명희 선생의 과 박경리 선생의 를 읽었다. 한국문학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슴 벅찼던 그 여름밤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질의 소설을 읽는 동안 이미 여름은 가고 없었다. 분명히 남은 건 내가 평생 뭘 해야 하고 써야 하는지 하는 것. 모름지기 소설 쓰는 작가란 무엇과 마주 서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던 여름밤.
소설 얘기는 가급적 삼가야 한다. 생각보다 읽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 꼭 읽어봐야 한다. 드라마를 봤으니 읽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바꾸고 읽어보시길. 선생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은 물론, 유려한 문장 속에 깃든 장인의 혼에 숙연해지는 마음은 부록. 무엇보다 재미있음에 축복.
맵시 나고 날렵해 보이는 검은 양복을 샀다. 여러 해 문상을 다니며 다음엔 꼭 검은 양복 한 벌 사야지 했었는데 문상의 기회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일이었다. 추모글을 다 쓰고 나면 난 새로 산 양복을 입고 선생님 장례식에 달려갈 참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벽에 걸어둔 양복을 힐끔거린다. 고인을 추모하는 산문을 쓰며 벽에 걸어둔 날렵하고 맵시 나는 검은 양복을 힐끔거린다. 저 멋진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서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철없는 생각의 끝에는 결국 선생님께서는 내게 저 양복도 남기어주셨는데, 난 뭐라도 드린 게 없나 하는 생각. 해보니 있다. 토지문화관에 무전취식하다 짐을 싸며 하는 고민 중에 하나는 선생님께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 수소문 끝에 돌아온 답은 담배였다. 제일 순한 담배 두 보루를 놓고 나왔던 기억이 났다.
“담배가 참 맛있어. 근데 담뱃값이 너무 올라서 그것도 만만치 않아” 하셨더랬다. 이후에도 나는 여러 선배 작가, 동료들에게 담배 선물을 추천했던 기억이 났다. 결국 내가 앞장서 선생님 가시는 길 빨리 재촉했나 무거운 마음뿐이다.
결국 선생님께 드린 게 담배뿐이라니. 내게는 선생님께서 남긴 사소함의 연유도 이리 많은데….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아침에 볼일이 있어 읍내에 나가려는데 갈 수 없었다. 귀래관 마당, 선생님이 이른 아침 작은 연못가에 기와를 일일이 쌓아 담을 만들고 계셨다. 나는 망설이다 일하시는 선생님 옆을 비켜 쭈뼛쭈뼛 지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다. 지난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당신이 병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지난해 초 토지문화관에 새로운 창작실 ‘귀래관’을 지으시고 무척이나 좋아하셨더랬다. ‘귀래관’은 여러모로 선생의 자상함과 작은 배려까지도 가득한 곳이다. 귀래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도 선생님께서 직접 돌을 놓아 만들었다. 오랜만에 뵈었을 때 그 돌을 놓다 허리를 다쳐 몸이 좀 불편하셨었다. “내가 이리 늙었어도 아직 돌 들 힘이 넘친다니까. 내 특기 중에 하나야. 지금도 돌 잘 나른다고….” 염려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때마침 스승의 날이어서 인사하러 간 자리였다. 매일 지나다닐 길이 걱정되어서 쉴 수 없었다고 했다. 마음 한쪽이 싸해졌고 선생의 마음 씀씀이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술 마시고 떠드는 소리 참 좋아”
어느 날 귀래관 휴게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소주 수십 병이 들어 있었다. 처음엔 자기 물건이 아니니 손대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 냉장고 안의 소주는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냉장고 안에서 소주를 꺼내 먹기 시작했는데 꽤 오래, 매일 밤 휴게실에서는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서먹서먹했던 사이의 통성명이 이루어지고 각자 방에 틀어박혀 하고 있는 작업 이야기들을 나누며 매일 밤 소주로 인해 친해져만 갔다. 후에 소주를 다 먹은 뒤에야 도대체 그 많은 소주는 누가 넣어놓은 것인지 궁금해졌을 때에야 알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 작가들은 술을 너무 안 마셔. 작가들이 젊었을 때 술도 마시고 해야지. 밤에 모여 술 마시며 웃고 떠들고 때론 싸우기도 하는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참 좋아.”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 우린 열심 철없이 매일 밤 취해갔다. 선생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꼭 한 번 소리쳐 선생님을 불러본 적이 있다. 한밤중이었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언제나 불이 켜져 있던 방을 향해 선생님을 불렀다. 기거하던 작가들 모두 모여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던 밤이었다. 선생님의 불 켜진 방을 향해 한 작가는 오징어춤을 추었다. 그날, 그 밤, 부디 우리들 노는 것 보고 즐거워하셨길.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밤새워 재롱 피울 것을, 너무 아쉽다.
두 번째 불러보는 선생님, 선생님 평안히 쉬세요! 얻어먹은 밥값 열심히 소설로 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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