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까지 간 청춘을 그리면서 짙은 여운을 남기는 영국 ‘브리스틀산’ 드라마
▣ 김도훈 기자
브리스틀은 관광도시가 아니다. 영국 여행을 앞둔 관광객이라도 브리스틀에 주목할 이유는 딱히 없다. 그 동네 공무원들이 만들어 뿌리는 팸플릿에는 세계 최초의 ‘서스펜션 브리지’가 근사하게 들어서 있지만 다리 하나 보겠다고 쇠락한 공업도시에 갈 이유는 없다. 뭘 좀 아는 관광객이라면 오랜 제국의 정취가 남아 있는 주변의 배스(Bath)로 가거나 근사한 산악지대가 펼쳐진 웨일스로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영어도 배우고 친구들도 사귀고 싶다고? 브리스틀은 영국 사람들에 따르면 “가장 촌스러운 사투리”와 “가장 숫기 없는 사람들”로 유명하다. 장담하건대 〈BBC〉 영어를 배워 상류층에 진입하고 싶다면 그처럼 나쁜 도시는 없다.
의기투합 ‘청춘 동물원’
그러나 요즘 한국 청춘들 사이에서는 브리스틀이 가장 ‘쿨’한 영국 도시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드라마 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가 뉴욕을 열정과 패션의 중심지로 재도약시켰듯이(심지어 그 드라마는 마지막회에서 뉴욕을 찬양하기 위해 파리를 발로 밟아 누르지 않았던가), 는 영국 서남부 중소도시 하나를 청춘의 진앙지로 밀어올렸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영국 에서 지난 2007년 1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는 확실히 지금 세상에서 가장 쿨한 청춘 드라마다.
의 주인공들은 브리스틀의 칼리지에 재학 중인 평균 나이 열일곱의 청춘들이다. 지금 영국 청춘들의 다양한 문제를 하나씩 나눠갖고 있는 주인공들의 면모를 보고 있노라면 제작진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욕심- ‘청춘 동물원’을 만들어보자!- 은 분명해진다. 주인공 토니는 근사한 외모의 바이섹슈얼 난봉꾼이며, 토니의 단짝 시드는 총각 딱지를 떼고 싶은 어수룩한 소년, 토니의 여자친구 미셸은 전형적인 학교 퀸카다. 캐시는 거식증과 폭식증, 약물중독으로 시달리는 패셔너블한 소녀로, 딱 케이트 모스의 재현이다. 맥시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게이 소년이며, 단짝 앤워는 가장 친한 친구가 게이라는 사실을 차마 집안에 알리지 못하는 무슬림 소년이다. 매회 에피소드를 하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방식 또한 영국 10대들의 다양한 마음에 현미경을 들이대려는 제작진의 시도다. 에 단 하나의 주인공은 없다. 진정한 주인공은 말 그대로 ‘지금 영국의 청춘들’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는 결코 청춘을 위한 청춘 드라마는 아니다. 는 영국에서도 18살 미만 관람불가인 심야 편성 드라마다. 섹시한 난봉꾼과 거식증에 걸려 비틀거리는 소녀와 대마초를 신성시하는 무슬림 소년과 그의 게이 친구. 이들에게 사회와 가족은 둥지가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거나 아이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결정으로 모두를 힘들게 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는 부모 세대와 사회에 반항하는 문제아들의 철없는 반항을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내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너무 일찍 자라버린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과 동등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친구 집단이라는, 작고 부서지기 쉬운 커뮤니티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홀로 자신의 문제와 대면한다.
한국에선 보기 드문 ‘사투리 연애’
의 도발적인 이야기는 영국 현지에서도 많은 논란을 만들어냈다. 많은 영국 언론의 질문은 ‘우리 영국 10대들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주연 배우 니컬러스 홀트가 말했듯이 이건 “모든 10대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의 매력이다. 의 이야기는 일부러 극단을 향해 치달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걸 두고 센세이셔널리즘을 통해 시청률을 높여보려는 제작진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건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이 탐미적인 청춘 드라마가 약물과 섹스로 얼룩진 황폐한 청춘의 마음을 쥐어짜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짙은 여운을 남긴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는 캐릭터들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간 뒤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시킴으로써 청춘의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당신이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는 개의치 않는다.
의 대담한 매력을 소화할 자신이 있는 한국 시청자에게도 여전히 질문은 하나 남는다. 영국 채널 는 근사한 젊은 애들이 떼로 등장하는 드라마를 왜 런던이 아니라 브리스틀에서 찍기로 마음먹었던 것일까. 뭐,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지역색이 강한 나라다. 한국의 방송사들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서울에서만 벌어지는 양 행동하지 않는다. 많은 영국 드라마들은 런던 외에도 맨체스터, 리버풀, 에든버러, 버밍엄 등 많은 지방도시를 무대로 하며 배우들 역시 각 지방의 사투리로 연기한다. 세계 최악의 중앙집권 국가에서 사는 한국 시청자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세상 모든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표준어로만 연애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명심할 때도 됐다. 총 9회로 제작된 의 첫 번째 시즌은 4월1일부터 케이블 채널 〈XTM〉을 통해 재방영되고 있다. 영국에서 올초 방영된 두 번째 시즌도 5~6월 중으로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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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스토넘은 청춘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괴물 중 하나다. 190cm가 넘는 키에 아름다운 턱선과 위험한 눈동자를 가진 이 소년은 애인과 친구를 제 마음대로 이용해먹는 능력을 타고났다. 머리도 좋아서 언제나 우등생. 게다가 이 난봉꾼은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까지 내키는 대로 유혹하는 왕성한 섹슈얼리티의 소유자다. 이쯤 되면 오래전부터 다운로드나 DVD를 통해 를 접해온 몇몇 국내 팬들이 왜 그렇게 공공연히 토니 스토넘을 미워하는지 충분히 납득할 만도 하다.
그러나 토니 스토넘을 연기한 배우 니컬러스 홀트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키 193cm의 이 영국산 미남자는 도무지 미워할 구석이라곤 없는 우성 유전자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989년생인 니컬러스 홀트는 2002년작 에서 휴 그랜트의 상대역인 꼬맹이 마커스를 연기하면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후 출연작들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관계로 니컬러스 홀트가 과시하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놀랍도록 낯설다. 홀트는 를 통해 의 소년 이미지를 벗어버린 게 꽤나 만족스러운 경험이라고 말한다. “토니 스토넘을 연기하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의 마커스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아닌 다른 면모를 내게서 보기 원한다. 대개 아역 배우들은 어린 시절 데뷔작의 이미지에 갇히는 경우가 많지 않나.”
를 통해 훌륭하게 성인 배우로 도약한 니컬러스 홀트는 두 번째 시즌을 끝으로 시리즈를 떠날 예정이다. “배드 보이 토니 스토넘 역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나. 20대를 눈앞에 둔 그는 아직도 벗어버리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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