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싸늘하지, 뻣뻣한 춤이라니

등록 2008-04-1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마네킹·인형같은 ‘물체춤’ 선보이는 일본 현대무용가 가나모리 조의 첫 내한공연 </font>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나무토막의 몸부림인가.

일본의 젊은 현대무용가 가나모리 조(34·사진)의 무대는 몸부림으로 활기를 뽑아낸다는 기존 춤의 상식을 깨뜨린다. 무대의 춤꾼은 물체나 도구일 뿐이다. 마네킹처럼 인간의 호흡, 냄새, 느낌도 없이 서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사지를 뻣뻣하게 움직이며 작동하는 것이 기본 얼개다. 기분 나쁘고 기묘한 분위기지만, 보는 관객의 머리 속엔 춤, 몸, 무대, 문명, 관계 등에 대한 갖가지 상상이 꼬리를 물게 된다. 과연 춤추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브라질·미국 등 순회공연서 호평

4월25~26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자신의 무용단 ‘노이즘08’과 첫 내한공연을 하는 가나모리의 대답은 명쾌하다. “무대에서 몸은 공간에 있는 하나의 물체”이며 “춤꾼은 관객에게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물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춤의 본질이라는 게 가나모리표 안무의 핵심이다. 그가 최근 세계 무용계에 혁명아로 각광받는 것은 이처럼 움직임이라는 최소한의 본질만을 춤의 화두로 집어내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안무의 군살을 빼고 미니멀 무용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 이 안무가는 겨우 30대 초반이지만, 최근 일본 현대무용의 가장 유력한 선두주자로 대접받고 있다. 10대 때 이미 대가 모리스 베자르의 무용단과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Ⅱ(NDTⅡ) 등의 서구 춤판을 섭렵했고, 귀국 뒤인 2004년 29살에 니가타 시민예술문화회관의 무용부문 예술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일본 최초로 지자체 상주 무용단인 ‘노이즘’을 만들어 세계 춤판을 놀라게 했다.

이번에 선보일 작품인 는 2005년 초연 이래 지난해 브라질, 미국 등지의 순회공연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올 2월에도 미국 워싱턴 케네디센터에 초청된 역작이다. 퉁퉁거리는 북소리로 시작하는 는 예쁜 제목과 달리 살벌한 느낌마저 주는 작품이다. ‘물질화하다, 희생하다’라는 부제처럼, 무대에 등장하는 여성 춤꾼들은 마네킹, 인형과 다를 바 없다. 인간적 온기나 움직임을 걷어버리고, 그들의 몸은 물질처럼 바뀌어 있다. 살색 무용옷을 입고 육체의 세밀한 선을 고루 드러내지만, 기계인간이나 자동인형처럼 뻣뻣하고 끊기는 동작만 지속할 뿐이다. 특히 검은 옷 입은 남성 춤꾼들의 손에 의해 여성 춤꾼들이 사지를 내맡긴 채 맞들려지고, 눕히고, 돌림 당하고, 세워지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인상적인 울림을 낳는다. 마치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의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외부 조작으로 움직이는 기계 혹은 물질이 되는 춤꾼들. 그 뻣뻣한 이미지로 우리 몸과 무대의 허구성, 움직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권유한다. 가나모리는 작업노트에서 이를 두고 춤꾼들이 ‘자부심 있는 제물’이 됐다고 말한다. 물체가 되어버린 춤꾼들의 자태는 거꾸로 생명의 흔적을 지우려는 강한 집중력의 산물이다.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렬한 몸의 힘을 느끼게 하는 그 역설적 구도의 카타르시스야말로 가나모리 조의 ‘물체춤’이 안겨주는 가장 쏠쏠한 매혹이라고 할 수 있다.

장면마다 조명·무대연출도 감각적

가나모리는 춤꾼들의 안무 말고도 무대연출까지 도맡으며 특출한 개성을 발산한다. 무대공간을 입체적으로 갈라, 춤꾼들의 동작에 힘과 개성을 부여하며, 춤꾼들의 등장 장면마다 색다르게 구획해가며 내쏘는 감각적 조명은 안무의 리듬감을 배가시킨다. 일본의 전통 연희와 서구 현대춤의 감성이 색다르게 어우러진 가나모리 조의 첫 내한무대는 세계 춤판에 강렬한 발자취를 아로새긴 일본 현대무용의 현주소를 엿보는 기회다. 금 저녁 8시, 토 오후 4시. www.lgart.com, 02-2005-0114.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