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예술의 ‘힘 논리’를 적실하게 보여주는 두 전시회, 김아타 개인전·이동기 근작전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실용의 시대, 실력 지상주의를 앞세운 힘의 논리는 미술동네에도 어김없이 밀려온다. 예술 취향은 본디 개인의 창조적 권리라지만, 서구(특히 미국) 시장에서 인기몰이한 작가들의 취향이나 트렌드는 되새김해볼 여지도 별로 주어지지 않는 요즘이다. 관객은 미술관이 베풀어준 ‘좋은’ 취향을 익히고 칭찬하는 버릇부터 들이는 편이 이롭다.
미술 권력의 새봄 첫 전시 주인공이 되다
이 시대 예술의 적실한 단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전시회가 있다. 한국 미술판에서 가장 힘(영향력) 센 전시장이라는 삼성미술관 산하 로댕갤러리(02-2259-7781)의 사진가 김아타씨 개인전과 서울 청담동 갤러리2(02-3448-2112)에서 2년 만에 마련한 팝아트 작가 이동기씨의 근작전이 입담거리에 오르고 있다.
5월25일까지 열리는 로댕 전시는 최근 미국에서 통 크고 도발적인 사진 연작으로 인정받은 김씨를 국내에서도 확실한 대가로 아로새김시키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보인다. 공학도 출신으로 사진을 독학한 김씨는 90년대 이래 도발적 구도의 누드 군상으로 유명해졌다. 벌판, 바닷가, 발굴 현장 등에 알몸의 남녀들을 널브러지게 한 ‘해체’ 연작, 유리상자 안에 알몸 모델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충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거나, 이 누드 상자들을 바닷가·사찰·거리 등에 갖다놓고 찍는 ‘뮤지엄’ 프로젝트가 그랬다. 2002년 이후에는 미국에 건너가 사라짐을 화두로 한 ‘온에어’ 프로젝트라는 사진 연작을 창안했다. 오랫동안 렌즈를 노출시켜 뉴욕·베이징·델리 도심을 인적 없는 유령 거리로 바꾸거나, 마오쩌둥·해골 등의 얼음조각이 서서히 녹는 장면을 확대해 담아내거나, 풍경 사진 이미지를 수백 장 수천 장, 심지어 1만 장까지 포개면서 본래 이미지를 사라지게 했다.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는 선불교의 화두를 내건 이런 작업들은 울림이 있었다. 2006년 뉴욕 국제사진센터 전시회에 소개된 이래 와 국내 언론의 호평이 쏟아졌고, 지난해 뉴욕 아시안 컨템퍼러리 아트페어에서 국내 작가 최고가인 점당 21만달러(약 1억9천만원)에 팔리는 호재를 누렸다. 반면 김씨는 국내외 평단에 체계적인 작가론이 거의 없으며, 여전히 과대포장됐다는 지적을 달고 다닌다. 국내 평단은 작품성을 거론하기보다, 서구인 취향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대 빤히 바닥이 보이는 선정적 사진을 찍는다는 시선들을 던진다. 그런 그를 미술 권력인 삼성미술관 쪽이 새봄 첫 전시 주인공으로 택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전시장은 2006년 미국 개인전 당시 인기를 모았던 ‘온에어’ 시리즈의 ‘사라지는 사진’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열람하도록 구성했다. 세 가지 방식으로 짜맞춘 사라짐의 코드들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카메라의 장기 노출로 인파가 사라진 대형 축구경기장, 자동차 전시장, 뉴욕·베이징·델리의 유령 도시 같은 풍경들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얼음이다. 마오쩌둥·해골 등을 새긴 얼음조각이 녹아내리는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확대해 보여준다. 이미지를 중첩시켜 인도의 풍경 이미지들을 미니멀한 색채 덩어리로 만들고, 남녀의 섹스 이미지들을 마치 뒤샹의 연속 그림처럼 만들기도 한다. 당연히 사진들은 신비주의 코드지만, 기실 이들은 절묘한 모자이크에 가깝다. 서구에서 잘 먹히는 현대미술의 흥행 트렌드들을 사진의 구도와 형식에 절묘하게 버무리면서도 전체 분위기는 선불교적으로 갈무리한다. 영국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 독일 사진가 구르스키 등의 대가들에게서 보이는 엄청난 덩치의 스케일과 기발한 소재 감각, 풍경이나 정물의 세련된 디테일 등이 매혹으로 반짝인다. 얼음 해골 사진에서 허스트의 보석 박은 해골 조형물을 떠올리듯, 김씨는 구경거리를 잘 만드는 작가다. 새롭지 않은 그의 사진 기법이 호평받았던 데는, 이런 트렌드에 대한 집요한 연구·분석이 분명히 한몫했을 것이다.
번득이는 제왕 같은 실존 욕망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고? 불교의 상식을, 작가 입에서 나온 명언처럼 전시장 벽에 인쇄한 이 전시의 화두는 기실 전시의 전체 구성과 맞지않고, 균열을 일으킨다. 전시장 무려 세 곳에 그의 세세한 작업 광경과 현지인들의 칭찬, 이전 작품들을 보여주는 비디오물이 배치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로댕의 전시틀 자체는 작품 위에 신처럼 군림하는 작가 김씨의 제왕 같은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 공간에서 전시했던 사진작가 강홍구씨는 “분출하는 작가의 본능과 욕망이 느껴지지만, 작가 의식이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스스로 알고서 작업했는지는 정말 의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작가는 소재 자체에 프로답게 집착한다. 비로드천 같은 무공해 대지로 뒤덮인 휴전선의 비무장지대 사진이나 절간 사천왕상의 이미지를 겹친 작업 등은 강렬한 초현실적 감흥을 몰고 온다. 그럼에도 사진 속 김씨의 시선은 정교한 광학기계의 시선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한국 사진동네의 뜨악한 반응은 기실 이런 얕은 시선 때문이다. 전시가 짐짓 흥미로우면서도 내심 큼큼한 뒷맛을 남기는 것 또한 국내에서 가장 힘 센 미술관이 미국에서 구경감을 들고 온 사진작가의 작업을 별다른 비평적 맥락도 없이 명품관처럼 펼쳐놓은 데서 비롯한다(전시 도록에 실린 글은 작가론이라기보다 홍보글에 가깝다). 왜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김씨에게 변변한 작가론·비평론이 없는지, 작가가 강조하는 선적인 화두를 담론으로 심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김씨에게 덧씌워진, ‘테크닉으로 오리엔탈리즘을 울궈내는 작가’란 굴레를 이번 전시는 풀지 못할 공산이 크다.
4월26일까지 근작들을 두 부분으로 갈라 개인전을 여는 팝아트 1세대 작가 이동기씨는 상반되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TV, 잡지, 광고 등의 대중문화 이미지들을 미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한국 팝아트의 개척자로서, 작업에서 담론을 끌어내는 몇 안 되는 작가였던 그는 요즘 부쩍 시장에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어색하고 생경한 추상 그림을 팝아트와 같이 들고 나왔다.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결합시킨 특유의 아토마우스 그림 위에 거친 원색 물감 덩어리들을 밀어버린 듯한 추상 그림을 배치해, 팝아트와 색조 추상이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었다. 이 추상 그림은 독일 거장 리히터의 것을 사실상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던질 법한 이 파격을, 그는 오래전부터 가졌던 추상 충동을 밀어붙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팝아트와 맞물린 추상 화면은 구도, 색면 등이 다분히 조악하며 급조된 느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년이 다 된 캐릭터 아토마우스가 왜 리히터의 추상과 만나야 하는지, 그 개연성도 그림 자체로는 납득되지 않는다.
왜 아토마우스는 리히터와 만났나
이씨는 80년대 후반, 제도권의 단색조 추상이나 참여미술의 진지한 사실주의 그림 사이에서 어깨 힘 뺀 대중문화 이미지를 미술판에 들여온 장본인이다. 일본의 팝아트 대가 무라카미와 맞수라던 그의 내공은 갈수록 시장의 물결에 밀려 퇴색 중인 느낌이 역력하다. 전시를 본 기획자 손성진씨는 “해외 시장을 누비는 후배 작가들의 약진이나, 식상해진 아토마우스 캐릭터 작업의 제약 등을 의식한 노력으로 보이지만, 조급증에 쫓긴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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