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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와 알몸 공연, 당당하다”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누드 사진 파문과 관련해 다섯 달 만에 에 처음으로 심경 고백한 발레리나 김주원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제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이라는 것. 그 소신과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국립발레단의 얼굴이자 국내 최고의 프리마발레리나(여자 주역)로 손꼽히는 김주원(30)씨는 생머리를 풀면서 말했다. 머리핀을 하나하나 끌러내는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4월16~1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올릴 클래식 발레 공연을 앞두고 맹훈련 중인 그가 지난해 10월 연인과 같이 찍어 대중잡지에 실은 누드 사진 파문과 관련해 자기 심경을 다섯 달 만에 처음 에 털어놓았다.

“언론에서 막 기사를 쓴다는 말을 듣고 부끄럽다는 느낌부터 들었어요. 누드 촬영 자체가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당당하게 누드를 찍고 알몸 공연을 하던 무용계 다른 선배, 동료들에게 말이죠. 국립기관의 연기자 중에도 찍은 사람이 있는데, 무슨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제 춤짝이던 이원국 오빠는 ‘네가 스타는 스타인가 보다’라고 놀리더군요.”

사전에 촬영 사실 보고했는데도 중징계

여유로 다져진 매끄러운 말투. 누드 파문 뒤 사전 보고 및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레단에서 감봉 1개월 중징계를 받을 당시의 상황을 캐물었다. 김씨는 잠시 머뭇한다. 긴 손가락을 사뿐하게 놀리며 핀을 풀어 가지런히 탁자 위에 놓는 동작을 거듭한다. 춤사위 같다. 김씨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절차를 어긴 게 없어요. 누드 사진 찍는 것도 사전에 발레단 상부에 보고했고, 아무 제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봉이라니… 그런 처분에 정말 놀랐죠.”

사전에 외부 활동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발레단쪽의 당시 징계 사유 설명과 다른 말이다. “사전에 홍보팀에 촬영 사실을 분명히 보고했을 뿐 아니라, 절차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노조나 단원들이 서명운동 등을 하자며 들고 일어날 기세였으나 당시 준비 중이던 기획 공연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겨우 이들을 달랬다”고 비화를 밝혔다. 또 “당시 박인자 전 단장이 사석에서 유감스럽다는 말을 건넸는데, 나는 그가 미안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김씨는 “여태껏 발레단 규율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복무에 충실했는데, 근거 없는 중징계를 받아 마음의 상처가 좀 컸다”고 웃었다.

특히 심한 상처를 받은 것은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한 일간지 기자의 ‘거짓말’ 때문이라고 했다. “취재 당시 기사를 쓸 사안이 전혀 못 된다면서 저를 두둔하더라고요. 그런데 다음날 정반대 방향의 기사가 나왔어요. 저보다 단원들이 더욱 격앙되어 그 기자에게 항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누드 찍은 잡지는 배포가 다 됐고, 다음호 잡지가 나오던 참인데, 왜 그때에서야 그렇게 보도하면서 난리가 났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그때 가장 힘이 된 것은 최태지 현 단장이 밤에 슬쩍 걸어온 전화였다고 한다. 모든 연락을 끊고 있던 그에게 “선배로서, 너를 예술가로 보호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최 단장은 다독여주었다. 사건 뒤로 파문은 컸지만, 발레의 춤꾼도 무대의 가식적인 연기자가 아니라 표현을 고민하는 진짜 아티스트라는 것을 어떻든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더욱 스스럼없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엔 주인공의 알몸 장면도 있는데…

김씨는 누드 파문 뒤 자기 사진을 다른 모델들의 누드 사진과 같이 대림미술관에 전시하려다 무산된 경위에 대해서도 “내 생각이 아니라, 사진가 김용호씨가 내 상황을 배려해 사진 전시를 보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라면 언제든지 벗어도 상관없다”며 “때가 되면 김용호씨가 찍은 누드 사진을 공개할 생각도 있다”고 했다.

“서구에서는 발레에서도 누드 공연을 예사로 해요. 파리 오페라단이 공연한 마츠 에크의 을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전체 알몸으로 무대를 뛰어다녀야 해요. 세계적인 안무가 지리 키리안의 작품에도 여성들이 상반신 알몸으로 뛰어다니는 대목이 있고, 제가 공연했던 마이어의 에도 군무 장면 중에 상반신 누드가 들어 있어요.”

발레리나 김주원은 당당하다. 그는 요사이 작품을 분석·연구하는 ‘프로’로서, 의 성공을 위해 일상의 모든 행위를 줄리엣의 이미지에 투사하고 있었다. 이번에 국내 초연되는 은 최태지 단장과 더불어 김씨의 또 다른 스승인 러시아의 거장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81)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대로 원수관계인 캐플릿-몬테규가 두 연인의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나, 로미오는 더욱 남자답게, 줄리엣은 더욱 여자답게, 그리고 양가의 대립과 사랑의 비극은 더욱 극적이고 강렬하게 다듬은 것이 안무가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특징이다. 그가 날아와 연기를 지도하다 발레리나 출신의 부인 베스메르트노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돌아가면서, 김씨를 비롯한 단원들은 더욱 비장한 각오로 연습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상대 배역과 같이 연기할 때 더욱 개성이 살아난다”는 그는 최근 수년째 단짝인 우람한 몸매의 후배 김현웅씨와 같이 연기하게 된다. 섬세한 소녀의 모습 속에 강인한 여성성이 살풋 깃든 줄리엣 캐릭터를 선보이려 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에, 그만의 캐릭터를 개발하기 위해 수십 편의 영화, 뮤지컬, 다른 발레 버전 등을 비디오로 보고 있고, 단행본을 읽는 것은 물론 연출가, 일반 관객과도 배역에 대해 대화를 한다. 한솥밥 먹다가 2002년 네덜란드로 날아가 현지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가 된 김지영씨와도 공연에서 번갈아 줄리엣을 선보이게 되어 설렌다. “역동적 개성이 강렬한 지영이의 이미지는 여성적이고 섬세한 느낌을 이야기에 실어 전달하는 저의 캐릭터와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줄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호랑이 스승 최태지 단장의 격려가 큰 힘

“이제는 주변에서 같이 추는 춤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요. 같이 추는 무용수들의 호흡이 느껴지고, 그 엄청난 에너지를 느껴요. 저도 그렇고 주위 동료들도 같이 추면 힘이 난다고 해요. 그런 게 얼마나 중요한 에너지가 되는지 모를 거예요.”

그는 최태지 단장이 “춤은 움직임만이 전부가 아니라 정신적 배경을 같이 공부하고 갈고닦아야 한다”고 했던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춤을 춘다고 말한다. 최 단장은 김씨에게 인생 스승이기도 하다. “자존심, 색깔에 앞서 겸손함과 남에 대한 배려 없이 나올 수 없는 게 발레라는 것을 일깨워주신 분입니다. 처음 입단했을 때 눈물 나도록 혼만 내던 호랑이 선생님이 공연 리허설 때 제 춤을 보시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분의 눈물만큼 큰 힘이 있을까요.”

대화가 무르익는데, 빨리 연습장으로 내려오라는 휴대전화 연락이 잇따른다. 그는 일어서면서 “정말 미련한 사람이 나”라고 했다.

“창피한 말이지만, 나이 삼십 되도록 춤추는 것밖에 몰라요. 은퇴 뒤 뭘 할까 하는 생각을 요만큼도 안 해봤어요. 새로 겪고 배워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아요. 기자분과의 대화도 제게는 삶을 춤에 담고 표현해가는 과정이지요. 손짓 발짓 하나하나에 인생이 담긴 춤, 바로 제가 원하는 춤이죠. 기자분도 자기 인생이 담긴 기사를 쓰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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