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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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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미술판에 깡패상어 출몰!

등록 2008-03-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맥락으로 읽기’전·‘기는 풍경’전·‘언더쿨드’전 등 ‘청개구리 작가’들이 던지는 상상력의 폭탄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지난해부터 국내 미술판은 예민해졌다. 그림 시장이 커지고, 작품 파는 재미를 붙인 탓인지, 젊은 작가들은 영악해졌다. 패션처럼 구매자 취향과 트렌드를 따지고, 잘 팔리는 장르와 색감, 스타일 계보를 줄줄 꿰면서 작품을 만든다. 시장은 살되, 작가는 ‘좀비’처럼 획일화·도안화했다는 한탄이 잇따른다. 그러나 시장 흐름과 거꾸로 된 쪽으로, ‘나대로’ 간다는 ‘청개구리 작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태를 빚는 조형예술의 본질을 추구하고 스스로 즐기는 실력파들도 간간이 출몰한다.

△ 서울 몽인아트센터에 차려진 ‘맥락으로 읽기’ 전 전시장 2층. 미끈한 몸에 여러 색깔 도료를 덮어쓴 험악한 인상의 상어조형물(홍정표 작)들이 떠다니듯 놓였다. 온통 녹색빛의 마른 물감 붓질로만 채워진 대형 추상그림(박기원 작)들이 그 공간을 둘러쌌다. 물결처럼 보이는 박씨의 추상 드로잉과 심해를 부유하는 듯한 상어 조형물의 이미지가 묘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사진/ 몽인아트센터 제공)

“갈수록 개념 따지는 현대미술 힘들다”

서울 삼청동의 동사무소 위쪽 몽인아트센터(02-736-1446~8)가 이런 청개구리 작가들의 작품들을 도드라지게 벌여놓았다. 5월4일까지 열리는 ‘맥락으로 읽기’라는 제목의 전시에 출품한 박기원(44), 박화영(40), 홍정표(32)씨다. 센터가 마련해준 서울 신당동 작업 공간에서 지난해 4월부터 1년 가까이 줄곧 맘먹고 자기 작업만 원없이 하다가 나온 참이다. 그들의 전시장 2층을 올라간다. 온몸이 문신처럼 울긋불긋한 험상궂은 이미지의 ‘깡패상어’가 이빨을 드러내면서 그림들 속을 떠다닌다. 전시장 벽은 온통 푸르뎅뎅하게, 혹은 거무튀튀하게 붓질한 선으로만 채워진 거대한 추상그림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험상궂은 이빨을 드러낸 상어는 청년작가 홍정표씨의 작품이다. 깔끔한 조명과 정돈된 분위기의 전시장 속을 떠도는 ‘깡패상어’ 세 마리. 폴리코트라는 합성 재료로 100kg 넘는 몸을 말끔하게 떠서 만들었다. 뒤덮은 울긋불긋한 자동차 도료의 얼룩이 상어의 광포함과 불온한 이미지를 아리게 전달해준다.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우리 삶에서 멀어지고, 갈수록 개념을 따지는 현대미술이 너무 힘들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상어, 고등어, 도넛, 아이스크림 같은 일상의 친숙한 이미지들을 가져와 인공적 재료로 다시 뜨고 채색하고 색깔을 고치고 하는 작업들에 천착하면서 현대미술과 대중의 소통을 고민한다고 한다. 현대미술을 잘 모른다는 ‘열등감’이 작업의 모티브가 되며, 수정한 흔적 자체를 작품 삼는다는 이 작가는 미술 시장에도 제법 알려졌지만, 공장 제품 찍듯 작업하기는 싫다고 잘라 말한다.

천성적으로 텅 빈 공간을 메우는 데 몰두해온 박기원씨는 지난해 4월 초 스튜디오에 들어온 시점부터 줄곧 기름을 뺀 유화물감으로 마른 드로잉만 했다. 세로 2m, 가로 1m가 넘는 대형 화폭에 일주일에 서너 장씩의 드로잉을 그렸다. 올 8월까지 이어질 입주 기간에 모두 140장의 대형 드로잉을 그리기로 진작 일정까지 짠 터다. 좋아하던 자연의 색깔인 녹색에서 점차 자연의 변화, 혹은 조락을 상징하는 갈색빛 톤으로 색조를 바꿔나가겠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작업실에 츨근부 찍듯 드로잉을 해왔다. 스튜디오에서 죽죽 무심한 마음으로 그어낸 그림들은 1년이 다 된 지금 녹색에서 짙은 회색으로, 약간의 갈색을 머금은 그림으로 바뀌었다. 일정한 색조와 수직, 수평, 사선이 밀도감 있게 만나는 이들 추상 그림은 무심한 붓질과 달리 공간이 튀어나오는듯한 느낌을 안긴다. 생전 처음 큰 작업실에서 큰 화폭에 드로잉을 해봤다는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속 바뀌어가는 작가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만화·인터넷·잡지 활용한 공동작업

국내 몇 안 되는 실력파 영상작가로 손꼽히는 박화영씨는 일상 사건을 소재로 쓴 자작 소설 의 이야기 배경으로 작업장의 공간을 뜯어맞췄다. 그 개조와 탐색의 과정들을 영화·영상·사진으로 드러내고, 실제 작업 중 수집하거나 만든 결과물들을 1층에 잡다하게, 음습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자기 일상의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책, 영화, 사진, 소품 전시 등을 내키는 대로 쓰고 흔적을 남겨놓은 격이다. 1990년대부터 자질구레한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일상의 진실을 다루며 마이크로한 영상매체 작업을 선도해왔던 이 작가는 1년 동안 신당동 작업실에서 주변 풍경은 물론이고, 각종 보잘것없는 허섭스레기, 바위 이끼들까지 다 자기 이야기 속에 집어넣었다.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루마니아산 이발소 그림, 키웠던 거미의 사진, 화분 이끼를 확대한 유화, 곰팡이 낀 식빵의 연속 사진들, 빨간 헬멧과 비옷, 요절한 로커 재니스 조플린의 가발을 쓰고 노래하는 영상들, 떠돌이 개의 이미지들, 작업실 주변에 출몰했다 사라진 메르세데스 벤츠차 등등. 박씨의 난해한 소품들이 좇는 것은 우리가 지나쳤던 일상과 삶의 정신적 틈새다. 그 틈새에서 작가는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상의 영기, 신비스런 속성을 보여준다. 결국 무언가를 빚어 형태를 만든다는 조형의식, 작가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각자의 상황에서 절실하게 표출한다는 점이 이 괴팍한 3인 전시의 행간이 된다.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나, 요즘 미술이 놓아버린 작가의 존재 가치를 꼭 붙들어매려는 집착이 전시를 움직인다.

서울 통의동 대안공간 브레인 팩토리의 ‘기는 풍경’전(3월23일까지, 02-725-9520)도 청개구리 작가들의 작업전이다. 작가 강동형, 신하정, 이재씨는 만화·인터넷·잡지 등에서 따온 사회의 양극화 현상, 기업 부조리, 인터넷 문화의 양상 따위를 종이조각들에 그린 뒤 서로 붙여 기괴하면서 허술한 조형물을 만들었다. 완성도 측면에서 ‘지질하고’ 조악한 만듦새지만, 표현의 절실한 욕구를 머금은 이들 작업을 도심 곳곳에 걸쳐놓고 사진을 찍는다. 작가 이재씨는 “평면에 그리는 것만으로는 이 시대의 층위 다양한 이야기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압박감에서 비롯된 공동 작업”이라고 말한다.

서울 구기동 대안공간 풀(02-396-4805)에서 3월23일까지 열리는 ‘언더쿨드’전도 그런 맥락이다. 사진가 최원준씨는 냉전시대 서울 북쪽 변두리에 설치된 북한 남침 방어 시설의 재개발 현장만을 수년 동안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탐색한 사진 작업들을 보고하고 있다. 서울 북방 변두리를 지키려고 설치된 60~70년대의 방어용 콘크리트 시설물인 벙커, 비트, 방어선, 엄폐물, 대전차 방해물 따위가 은평 뉴타운, 의정부 등지의 택지 개발 현장 등에서 알몸뚱이로 소리소문 없이 스러져가거나 거석 기념물처럼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면서도 흥미롭고 아름답다. 작가는 “내 작업은 목적이 없었다. 기능과 목적이 어우러진 풍경이 주는 새롭고 차가운 기분, 그 역설적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말한다.

수년간 냉전시대 설치물 쫓은 사진가

북촌의 청개구리 작가들은 시장만 있고, 감각과 인식은 행방불명된 요즘 미술판에서, 나 홀로 예술전사로 출격한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곳곳에 상상력의 폭탄을 떨어뜨린다. 요즘 시장 유행과 ‘만사 거꾸로’ 가는 그들이 있어 미술판은 그나마 신진대사가 되는지도 모른다. 관객, 작가들의 머리 속을 두들겨 깨고 미술판에 고인 감각의 강물에 파문을 일으키는 작업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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