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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가 변했다?

등록 2008-02-22 00:00 수정 2020-05-03 04:25

이전보다 따뜻해진 남성 캐릭터와 여행 뒤 ‘명백한 귀가’를 보여주는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마침내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품에 안겼다. ‘밤과 낮’으로 헤매다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는 말한다. “이제는 여행을 떠나지 말아요.” 그것은 의 한성인(황수정)이 남편 김성남(김영호)에게 하는 대사지만 홍상수의 여자들이 홍상수의 남자들에게 비로소 꺼내는 말로도 들린다. 그렇게 홍상수의 남자들은 대개가 여행을 떠났고 여자를 만났으며 한참을 징징거리다 결국엔 섹스에 성공했다. 그리고 혼자 남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다만 이번엔 파리다. 혹은 그냥 파리다. 홍상수의 은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온 남자가 파리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가인 성남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경찰의 수사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파리로 도망왔다. 이렇게 홍상수의 은 감독의 말대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집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된 남자가 타관에서 처를 그리워하면서 겪게 되는 만남을 다루는 이야기”다.

파리의 연인과 서울의 아내 사이

생활에서 유배된 남자는 파리에서 한국의 생활을 발견하고 그리워한다. 성남은 오붓한 파리의 가족들을 훔쳐보고 그들을 질투한다. 그렇게 자신이 박탈당한 것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은 민박집처럼 남루하고 하릴없다. 예술가로 언젠가 한번은 와보고 싶었던 파리지만 엉뚱한 이유로 도망온 파리는 그토록 그리던 파리가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니 만남이 생긴다. 파리의 거리에서 우연히 옛 애인 장민선(김유진)도 만나고, 민박집 주인이 소개해준 유학생 조현주(서민정)와 함께 미술관 관람도 다닌다. 그리하여 성남의 남루한 일상에 찾아온 설렘은 현주의 룸메이트인 미술학도 이유정(박은혜). 이제 성남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성남은 파리의 낮에 유정에게 치근덕거리고 밤에는 서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투정을 부린다(파리의 밤은 서울의 낮이다). 이렇게 성남에게 두 개의 현실 혹은 두 개의 환상이 있다. 파리의 연인과 서울의 아내, 성남은 어쨌든 둘을 살아간다. 물론 진심으로. 당연히 성남을 걱정하는 아내도 쇼핑도 하고 심지어 연애도 하면서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하여튼.

홍상수의 인물들은 여전하다. 그들도 우리처럼 표리가 부동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남은 죄에 대한 성경 구절을 핑계로 옛 애인인 민선과의 섹스를 피하지만 막상 유정에게 매달리면서는 그렇게 되뇌던 죄의식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성남이 파리의 유정에게 느끼는 매력과 서울의 아내에게 얻는 위로가 동시에 진심인 것처럼, 에는 두 개의 진실이자 두 개의 거짓이 공존한다. 유정을 욕하는 여자들의 ‘뒷담화’도 알고 보면 거짓이자 진실이다. 성남은 진심으로 유정에게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예정된 거짓말이다. 성남은 예전의 민선에게도 그렇게 진심으로 고백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민선을 만나도 한동안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민선은 유정의 미래다. 한편으로 홍상수는 위선을 다루지만 그렇다고 홍상수의 인물들이 위선에 분노하거나 위선을 추궁하지 않는다. 성남은 유정의 표절을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유정에게 따지지 않는다. 그냥 유정을 더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일종의 수학이다. 홍상수의 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늘어놓는 정의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밤과 낮 같은 인간의 양면성을 증명하는 과정이고, 밤과 낮 같은 세계의 이중성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환멸에서 이해의 세계로 넘어간 듯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혹은 재현된 다큐멘터리로서 홍상수 영화의 생생함도 여전하다. 여행을 떠나온 남자와 그곳의 여자들이 그리는 삼각관계가 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만드는 애정의 피라미드는 사랑의 화살표에 따라서 철저히 위계화된다. 현주는 성남에게 약하고, 성남은 유정에게 쩔쩔맨다. 현주는 성남을, 성남은 유정을 호시탐탐 노리는 탓이다. 그렇다고 약육강식의 권력관계가 단일한 선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때로 현주는 치사한 방식으로 유정을 비난하고 유정은 더욱 치사한 방식으로 현주에게 복수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질투가 사랑의 가교가 되는 아이러니를 홍상수는 정교하게 증명한다. 한편으로 그들이 결국에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누구나 조금은 외롭기 때문이다. 사랑의 권력자로 보이는 유정도 치근덕거리던 성남에게 결국은 말해버린다. “자기는 진짜 남자 같애”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하는 거야?”. 이렇게 어렵게 꺼낸 유치한 진실에 피식 웃음이 터지다 깊은 한숨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어떤 순간과 몹시도 닮았기 때문이다. 주변인물 묘사도 생생한데, 그들은 파리라는 공간에서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파리적인) 것 사이에서 정신없이 헤매며 위선을 떤다.

그러나 홍상수는 변하는 중이다. 은 전작인 보다 너그럽고 편안하다. 그는 환멸을 넘어서 이해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주인공은 수다스러워졌고 유머도 인색하지 않다. 성남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치근덕거림도 예전보다 귀엽다. 여전히 성남은 수컷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홍상수의 예전 남자들보다 따뜻한 구석이 있다. 여성 캐릭터도 여전히 질투로 움직이는 동물로 비치지만 예전만큼 극단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예전 같으면 굳이 ‘까발리고’ 넘어갔을 것들을 은 적당히 묻어둔다. 그것은 일종의 선의로 읽힌다. 그들은 적당히 굳이 묻지 않아야 할 것들을 묻지 않는다. 성남과 유정의 이별처럼.

“이제는 여행을 떠나지 말아요”

그리하여 애정을 좇았던 남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언제나 살고 나서 말하듯 “또 미친 짓을 했구나” 되뇌면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자책하다 보면 어느새 집이다. 그렇게 성남은 아내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명백한 귀가가 홍상수 영화에서 처음이다. 그러니까 “살 맞대고 살아가는 최소 단위로서 가족”으로 “결코 차선을 찾을 수 없음으로 돌아가는 귀가”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여행을 떠나지 말아요”라는 당부를 듣는다. 이렇게 은 홍상수 영화의 중간 종합판 혹은 결산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돌아오는 남자가 있다. 그리하여 홍상수의 영화는 환멸의 세계에서 수긍의 세계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새로운 새벽이,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제58회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은 2월28일 개봉한다. 김성남을 연기하는 김영호는 수컷의 치졸함과 아이 같은 천진함이 뒤섞인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새치름하면서 응큼해 보이는 박은혜의 이미지는 이유정 역에 맞춤하게 어울린다. 배우들의 성격과 인상을 영화에 적확하게 차용하는 홍상수식 캐스팅의 또 다른 성공사례로 꼽힐 만하다. 의 배우 이선균이 북한 유학생 역으로 등장해 흥미를 더한다. 145분 상영시간, 그래도 즐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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