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청동 사리함으로 떠들썩하게 발굴된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사리알 존재에 의견만 분분
▣ 글·사진 부여=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병에 넣은 부처의 사리(화장한 유골) 세 알은 어디로 갔는가?
백제 27대 임금 위덕왕이 1400여 년 전인 577년 먼저 이승을 떠난 아들을 위해 사리 세 알을 넣어 바쳤다고 한문 글씨로 새긴 국내 최고의 청동 사리함과 금은제 사리병은 물음 앞에서 침묵할 뿐이다. 지난해 10월 초 백제 도읍지였던 충남 부여(사비) 왕흥사 목탑터 땅속 기둥돌 구멍에서 생생하게 발굴( 683호)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유물의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는 영영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짙어졌다. 유물을 발굴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월29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출토 사리기의 의미’를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문화재 전문가들과 이 의문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결론만 확인했다. 연구소 쪽은 발굴 당시 사리함과 사리병을 분석한 결과 한 알의 사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후대에 누가 꺼냈다? 아예 안 넣었다?
이날 자리에 토론자로 나온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불교미술사 전공)이 먼저 이 문제를 치고 나왔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명문을 보면) 백제 임금인 위덕왕이 나라의 큰 절(국찰)에 부처가 열반한 날짜인 2월15일을 골라 사리함을 봉안했다고 나온다. 게다가 사리병에 원래 2매를 넣어 모시려고 했는데, 신의 조화로 저절로 셋이 되었다는 구절까지 나온다. 이렇게 국가적 의미가 중대하고, 신묘한 영험을 내보인 사리가 한 알도 안 나온 발굴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는 “합리적으로 보면, 아예 처음부터 넣지 않았거나, 어느 때에 사리만 살짝 꺼냈다는 것밖에 답이 없다”며 “그런데 (공개된) 발굴조사 결과에는 이들 사리함과 사리병은 1400여 년전 넣은 뒤로 한번도 꺼내거나 다시 봉안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기에 더욱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목탑터 땅 표면과 그 아래 땅속에 묻힌, 사리 구멍 있는 기둥받침돌(심초석) 사이 구간에 흙을 되메우고 다진 흔적이 확인됐다는 사실을 이런 맥락에서 문제 삼았다. 앞서 목탑터 사리용기 갖춤에 대해 발표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학예관이 심초석은 땅 위에 있고, 지하의 돌은 사리를 넣기 위해서만 설치한 시설이라는 가설을 꺼냈기 때문이다. 강 소장은 이 가설을 겨냥해 사리를 보관했던 지하의 돌 위를 메우고 다진 흙이 손을 타지 않았다는 데 의문을 표시하는 발굴전공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후대에 누군가가 흙을 파내고 사리를 꺼내갔을 개연성을 암시한 셈이다.
이에 대해 김 학예관은 “만약 땅속에서 사리를 꺼내갔다면, 사리기도 같이 꺼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아예 넣지 않았거나 유기물인 사리가 땅속에서 녹아 사라질 수도 있지만, 현재 사리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어 각자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발굴 당시 사리가 오랜 세월 사리병의 산성 수분 속에 녹은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소의 조사 결과 사리를 입증할 만한 어떤 물질도 사리갖춤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발굴 뒤 사리병 안을 가득 채운 물을 분석한 결과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으로 생긴 물이었고, 특정 유기물이 많이 녹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조사단은 금제 사리병과 이를 싼 은제 사리병 사이 공간에서 미세한 구슬 모양 알맹이도 발견해 분석했으나, 사리와는 관계없는 금속성 물질로 드러났다. 또 사리 수가 신묘한 조화로 바친 것보다 더 늘어났다는 영험 현상은 중국 등지의 사리기 기록에도 간간이 나오는 것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종교적 신념의 영역이라는 게 미술사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 왕권 강화책의 하나로 사리는 넣지 않고,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이벤트로서 사리기 봉안 행사를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8천여 점의 귀금속·유리 공예품에 감탄
사리의 행방에 대한 호기심은 풀리지 않았지만, 학술대회에서는 사리함과 함께 바친 보석, 장신구 같은 고급 공예품에 대한 색다른 분석 성과들도 적잖이 나왔다. 우선 학계를 놀라게 한 것은 청동 사리함에 있는 문제의 명문을 새긴 방식이었다. 얼핏 상식대로 끌 등으로 여러 번 쫀 것이 아니라 ‘도자’라 불리는 옛 필기용 칼을 펜이나 붓처럼 놀려 쓴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서예사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청동사리함 명문의 서체를 분석한 논고에서 이런 분석 결과를 내고, “사리함 명문은 도자를 써서 한 번 붓질로 한 획을 완성하듯이 쓴 것”이며 “목간의 글씨처럼 여러 차례 칼을 놀려 깎아낸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런 필기 방식이 경이로운 것은 사리함의 재질인 청동이 돌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가는 정이나 끌로 쪼아도 원하는 모양이나 글자를 내기가 힘든데, 얇은 칼날을 꾹꾹 눌러 당시 중국 남북조의 예서·해서 글씨체를 조화시키고 토속적 멋까지 가미했다는 것이다. 공예사 전공자인 주경미 박사는 “칼로 눌러서 단단한 재질에 글씨를 써야 하므로 손과 팔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야 하며, 재질에 대한 이해와 조형적 감각은 물론 서예도 어느 정도 섭렵해야 이런 명문 글씨가 가능하다”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리함이 나온 지하의 기둥돌 석재 부근에서 8천여 점이나 쏟아져나온 각양각색의 화려한 귀금속, 유리 공예품들 또한 ‘하이테크’ ‘하이컬처’의 칭호를 백제 공예문화에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관모에 붙이는 철제테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명 운모로 만든 연꽃 장식물은 잎 모양 사이에 금박을 겹쳐 만든 것으로, 그 환상적 아름다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명품으로 칭송받는다. 또 쌀알보다 작은 구슬에 샤프심 지름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유리구슬·목걸이 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초정밀 세공술을 보여주는 실례다. 이런 내용의 목탑터 일괄유물의 성격과 의의를 발표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 이상의 정교한 안목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목탑터 공예품들은 한-중 사이에 제작지 논란이 일고 있는 금동대향로의 경우도 백제가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는 분석했다. 목탑 사리기 주변에서 나온 이 공예품들이 사리신앙 행사에 따른 것인 만큼 땅신을 달래는 예물인 지진구가 아니라 부처에 바치는 공양물이란 데도 참석자들은 대개 견해를 같이했다.
발굴 좀더 진행된 뒤로 결론 미뤄
한편 목탑의 주기둥돌이 사리기가 나온 지하 석재인지, 지상의 다른 돌인지를 둘러싼 논란과 600년 창건 기록과 다른 사리기 명문의 창건연대를 둘러싼 입씨름도 벌어졌지만, 결론은 발굴이 좀더 진행된 뒤로 미루자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행사 말미에는 근거가 미흡한 목탑의 3층탑 복원론이 나오는가 하면, 지자체의 사찰터 정비복원 방안 등에 대한 제안이 ‘뜬금없이’ 제기되어 참석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왕흥사터의 발굴 유물들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4월20일까지·041-833-0305)에서 특별전시 중이다. 금·은·동 사리기 갖춤을 비롯해, 운모연꽃 장식과 귀고리 등 공양물로 추정되는 갖가지 공예품들이 보존 처리를 마치고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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