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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은초딩’에게 끌리냐 물으신다면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텐트 치고 라면 끓이고 고기 구워먹는’ 정서에 몰입하는 즐거움, 한국방송 ‘1박 2일’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한국방송 의 ‘1박 2일’에는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 출신의 은지원이 출연한다. 그는 ‘1박 2일’에서 ‘은초딩’으로 불린다. 식사 준비는 안 하고 고구마 하나 더 먹겠다고 구석진 곳에 숨는가 하면, 자신이 게임에 져서 따뜻한 집 대신 텐트에서 자야 할 처지가 되자 분풀이를 하겠다며 삽으로 눈을 퍼 숙소에 뿌려대는 행동이 영락없는 ‘초딩’이다. 젝스키스 시절에는 팬들로부터 ‘은각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내세웠던 그가 왜 ‘초딩’으로 망가졌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은지원의 선택은 정확하다.

요즘 아이돌 그룹은 가요 프로그램이 아니라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에 있다. 이 ‘버라이어티 쇼 아이돌’의 대표 주자인 문화방송 에는 ‘리더’ 유재석부터 ‘막내’ 하하까지 멤버마다 각자 다른 캐릭터가 있고, 그들이 시청률 한 자릿수에 머무르던 시절부터 드라마도 달성하기 힘든 시청률 30%를 기록하기까지의 과정은 무명 아이돌 그룹의 성공기와 같다. 그것을 쭉 지켜본 팬들은 아이돌 그룹 이상의 열성적인 팬덤을 형성한다. 은 정말 정식으로 콘서트를 열었고, 자체 제작한 달력은 매진을 거듭하고 있다.

뱃멀미에 시달리고 ‘고양이 세수’ 하고…

은 오락 프로그램이 드라마와 인기 가수 못지않은 힘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큰 웃음’은 한 회의 시청률을 높이지만, ‘아이돌’에 비견될 만큼 잘 성장한 버라이어티 쇼 캐릭터는 높은 고정 시청률을 보장한다. 그리고 의 후발 주자인 ‘1박 2일’은 지금 시청자가 ‘무대 위의 카리스마’ 대신 ‘버라이어티 쇼의 초딩’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1박 2일’이 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박 2일’은 처럼 각자 캐릭터가 있는 6명의 남자가 출연하고, 초기에는 의 노홍철이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1박 2일’은 과 매우 다른 프로그램이다. 이 ‘덧셈’의 오락 프로그램이라면 ‘1박 2일’은 에 대한 ‘뺄셈’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점점 더 많은 도전 과제에 나서고 코미디부터 리얼리티 쇼까지 점점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과 달리, ‘1박 2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쇼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1박 2일’에는 마땅히 해야 할 ‘도전’이 없다. 1박 2일 동안 여행을 다녀오는 게 전부다. 쇼적인 요소라고는 여행 과정에서 누가 야영을 하지 않고 집에서 잘 것인가를 결정하는 ‘복불복 게임’밖에 없다. 그 게임도 거리에 널려진 연탄 쌓기나 씨름처럼 소소한 것들이 전부다. 쇼가 빠진 자리에는 여행의 ‘리얼리티’가 들어온다. ‘1박 2일’은 실제 여행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그들은 한정된 돈으로 장을 보고, 가거도나 삼척에 가기 위해 장시간 운전을 하거나 뱃멀미에 시달리며 배를 타야 한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의 리얼리티는 시청자에게 설명 없이 ‘1박 2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출연자들이 난방도 잘 안 되는 여행지에서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하고 얼른 방에 들어가는 현실의 디테일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그들이 여행에서 겪는 모든 이야기가 흥미로워진다.

드라마틱한 사건이 된 ‘복불복 게임’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평소에 우동 한 젓가락, 잠 한 시간에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면 그건 큰 웃음을 주기 위한 의도된 코미디다. 하지만 돈 몇 천원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하는 여행에서라면,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촬영 과정에서 어떤 조작도 없다는 제작진의 말처럼, ‘1박 2일’은 출연자들의 현실적인 리액션을 카메라에 담는다. 복불복 게임 중 가장 화제가 됐던 탁구 시합에서, 출연자들은 승패가 결정된 순간 가장 큰 리액션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크게 절망하거나 기뻐한 것은 그 직전에 한쪽의 어이없던 실수로 흐름이 결정됐을 때다. ‘1박 2일’은 긴장 속에 진행되던 경기가 한순간에 맥이 풀릴 때의 반응처럼 작지만 현실적인 부분들을 정확하게 집어내면서 시청자가 그들의 여행에 동참하도록 한다. 어느새 복불복 게임은 드라마틱한 사건이 되고, 고단한 여행길 끝에 먹는 저녁식사는 시청자의 침까지 꿀꺽 넘어가게 한다. 강호동이 힘든 대게잡이를 끝내고 직접 끓여먹는 라면의 맛. ‘1박 2일’은 그 맛이 여행의 클라이맥스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을 ‘서랍장’이라고 말하는 은지원의 ‘초딩’스러운 발언이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은, 그것이 여행지에서 뜨끈한 방에 이불을 둘러쓰고 친구들끼리 하는 사담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박 2일’의 캐릭터는 현실과 버라이어티 쇼의 묘한 경계에 서 있다. 그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여행 속에서 보여주는 리액션을 통해 캐릭터가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그것은 어디까지가 버라이어티 쇼의 코미디를 위한 캐릭터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모습인지조차 모호하다. 동료들이 몰래 무언가를 먹으려 하자 “이게 한 팀이냐”며 소리를 지르는 강호동의 모습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다. 이 재미있는 캐릭터로 더 재미있는 무엇을 보여준다면, ‘1박 2일’은 소소하게 웃기는 상황들에서 드러난 출연자들의 모습이 하나둘 모여 시청자에게 캐릭터가 ‘발견’된다. 그래서 ‘1박 2일’은 버라이어티 쇼의 웃음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큰 웃음’ 대신 마치 실제로 MT를 떠나듯 리얼한 상황 설정을 통해 시청자가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더 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실적이되 고생 없이 즐겁기만 한 쇼

이 뚜렷한 캐릭터가 있는 멤버들의 끊임없는 도전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마치 잘 자란 옆집 친구들처럼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면, ‘1박 2일’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밖에서 텐트 치고 라면 끓이고 고기 구워먹는’ 한국인 특유의 여행 문화에 대한 정서를 현실적이지만 부담 없이 보여주면서 시청자를 빠른 시간 안에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버라이어티 쇼에 원하는 것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 두 프로그램 외에도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마치 회사원들처럼 남자들의 ‘라인 문화’를 보여주는 과 외국인이 한국인의 생활 문화를 말하는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버라이어티 쇼와 그 출연자의 ‘팬’이 된다. 과거의 10대들은 아이돌에게서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성공하고,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신화에 열광했다. 그리고 지금의 시청자는 버라이어티 쇼에서 그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적이되 현실의 부담과 고생 없이, 오직 즐겁게 몰입만 할 수 있는 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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