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재출간 책 쏟아져나와… 기획의 중요한 테크닉 “옛날 책을 다시 보라”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우리는 어떤 책이 타고난 절판의 운명에 순응하기만 해야 하는가? 그 운명에 대한 심판을 다시 한 번 붙일 수는 없는가?” 이윤기는 ‘개정판에 붙이는 말’에서 이렇게 썼다. 은 이렇게 ‘엄숙한 물음’과 함께 재탄생했다. 도나 타트의 은 오랫동안 헌책방 탐사자들의 ‘쇼핑 리스트’에 올라 있던 ‘절판의 전설’이다. 1992년 까치에서 나왔던 이 책은 지난해 12월 문학동네 장르문학 시리즈 ‘블랙펜 클럽’의 1권으로 재출간됐다. “책은 그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책의 운명은 절판이다, 라고만 하면 왠지 아쉽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이 로마의 작가 테렌티아누스 마우루스의 말을 따 붙인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이, ‘절판본’에서는 ‘절박’하게 느껴진다. 표정훈은 ‘절판 도서 살리기’(kungree.com)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그 나름’의 운명이라고는 해도, 절판이라는 운명은 책의 물리적 소멸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가치의 윤리학보다는 효율의 경제학이, 생각의 깊이보다는 생각의 속도가, 역사의 무게보다는 순간의 가벼움을 중시하는 풍토라면, 가혹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되살아날 수 있는 책의 숫자도 그만큼 적을 것이다.”
최근 이 ‘운명’을 거역한 책들의 거대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다시’ 플러스 새로운 의미
‘새 생명’을 부여받는 데는 명확한 ‘계기’가 있는 경우가 많다. 처럼 ‘황금’ 붙은 세 권짜리 책들이 그렇다. (김영사 펴냄)은 동명의 영화 개봉을 계기로, (뿔 펴냄)은 저자 도리스 레싱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나왔다. 길찾기에서 나온 권교정의 만화 은 월간 장르문화 매거진 의 연재 재개와 함께 재출간됐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열림원 펴냄)는 같은 저자의 (현대문학 펴냄)의 반응이 좋자, 2005년 책을 표지갈이해서 ‘개정판’으로 나왔다.
그러나 ‘재출간’은 나왔던 작품을 ‘다시’ 펴낸다라는 뜻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올 초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로맹 가리의 는 각각 고려원에서 1985년, 신구문화사에서 1968년 출간된 책의 재출간본이지만, 번역도 다시 했고 흩어져 있던 작품을 모았다는 의미도 더해졌다. 부커상 수상작인 이언 매큐언의 역시 미디어2.O에서 새로 나왔는데 1999년 현대문학에서 나왔던 작품을 새로 번역한 것이다. 최근 김연수 번역으로 나온 레이먼드 카버의 은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하고 있는 ‘레이먼드 카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전에 나온 집사재의 ‘레이먼드 카버’ 시리즈(1996)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일본판으로 추정되는) 원본이 불분명한 ‘편집본’이었다면 문학동네에서는 미국에서 출간된 원본대로 펴내고 있다. 집사재 시리즈는 3권으로 끝났는데, 문학동네 시리즈는 여기에 더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김연수의 번역으로 (가제)가 나올 예정이다.
“다시 내려면 의미가 있어야 한다. 장단점을 살피고 의미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2005년 여름 을 새로 출간하고 ‘예상외’의 반응을 얻었던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의 말이다. ‘스테디셀러 복병’으로 자리잡기까지 ‘출간 결정’은 ‘재고·삼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1996년 까치에서 나온 (재출간본은 제목이 살짝 바뀌었다)은 추리소설 동호회에서 “이런 책이 절판이라니 말이 안 된다”라는 말을 들었던 작품이다. “그래도 좀 망설여졌다. 그런데 김연수씨가 적극적으로 추천을 했다. 그렇게 되고 안 낼 이유가 없었다.” 마음산책은 에 대한 좋은 반응이 있고 나서 4권의 ‘리메이크작’을 펴냈다. 로맹 가리의 , 에프라임 키숀의 , 그리고 박찬욱의 다. 이런 리메이크 작품이 반응이 좋자 마음산책에서는 회의를 할 때 구간본 출간에 대한 논의를 병행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50~100권의 재출간 목록을 뽑아 에이전시에 문의한 적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70% 이상이 다시 저작권 계약이 이루어져 있었다.”
재출간 붐, 1996년부터 5년마다 주기로?
기획자들에게 “구간을 살펴라”는 자주 이야기되는 ‘기획 원칙’이다. 궁리 출판의 김현숙 편집장도 “최근 옛날 출판 잡지를 뒤지며 잊혀진 책들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인문서 시장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산책자의 김수한 편집주간은 “지난해 인문 쪽 기획의 키워드가 ‘옛날 책을 찾아라’였다. 1980년대 정당한 계약 없이 봇물처럼 쏟아졌던 책들이 인문학의 보고다”라고 말한다. 산책자에서는 보드리야르의 (문예마당·1994), 롤랑 바르트의 (민음사·1997) 계약을 맺고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나온 에드워드 윌슨의 는 그 이전에 두 번 나왔던 책이다. 1962년 을유문화사에서 , 1990년 실천문학사에서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정치학자 해나 아렌트의 책 역시 ‘민주주의’ 담론에 대한 연구 붐을 타고 거의 다 복간됐다.
이러한 ‘재출간’ 붐에 대해 김현숙 편집장은 “저작권법이 원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재출간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 아닌가 한다. 요즘 2001년, 2002년에 나왔으나 책의 가치에 비해 호응이 적었던 작품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한다. 외국 저작물과의 계약은 보통 5년을 단위로 갱신된다.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발효된 것은 1996년. 1987년 10월 가입한 세계저작권협약(UCC)이 먼저이긴 하지만, 1996년부터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8월 가입한 베른협약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외국과 계약 후 출간’이라는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관행’이 정착했다. 김 편집장의 말대로라면 2006~2008년, 1996년을 기점으로 하는 5년 단위의 새로운 ‘계약철’이 도래하는 것이다.
리메이크작의 성공은 기획자들을 자극해왔다. 그중 ‘고려원 리스트’는 복간의 주요한 대상이다. 파울루 코엘류의 ‘초베스트셀러’ (문학동네 펴냄·2001)는 고려원의 (1993)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최종 부도처리된 고려원은 연평균 270여 종의 책을 펴내던 당시 ‘단독’ 매출 1위의 출판사였다. 당시 200억원 규모의 연매출을 기록했는데, 2위는 100억원 미만이었다. 고려원의 부도로 총 2만여 권의 문학, 인문, 실용, 여러 전집이 한꺼번에 ‘절판’됐다. 2004년 고려원북스가 고려원 재고와 판권에 대한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고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출간이 순조롭지는 않다. 처럼 재출간 형태로 다시 발간된 책도 적지 않다. 고려원북스의 편집자는 “소설 과 아동책 몇 권을 재출간했다. 몇 권의 판권을 알아보고 있으나 신간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출판 환경도 재출간 붐을 이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은 팔린 책의 반 정도가 한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통해서 판매됐다. 알파 블로그의 역할이 커진 것이다. 기술문명이 바뀌면서 소비구조가 바뀌고 있다. 소비에서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런 블로거들의 활약은 장르문학에서 두드러진다. ‘일본 미스터리문학 즐기기’ 카페의 운영자이자 번역가인 권일영씨는 ‘장르 마니아’들과 ‘절판’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장르소설은 ‘품절’되는 사태를 겪는 일이 많다. 그래서 정보 교환을 위해 카페 활동이 활발하다. 품절이 자주 되니 소장 욕구도 강하다.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사다 쟁여놓는 경우가 많다.” 이런 소비자들의 ‘계속되는 애절한’ 요구는 재출간 결정으로 이어진다. 절판됐던 다카무라 가오루의 은 손안의책이, 는 북스피어가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일본의 9개 출판사 ‘공동 복간 프로젝트’
외국에서는 더 ‘조직적인’ 절판책 복간 움직임을 만날 수 있다. 일본의 복각닷컴(www.kinokuniya.co.jp)은 독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복간작 리스트를 모으고 의견이 많이 모이면 출판사에 의견을 전달한다. ‘서물복권(書物復권) 프로젝트’는 출판사 쪽에서 진행한다. 도쿄대학출판회, 호세이대학 출판국, 미스즈출판사, 기노쿠니야, 미라이샤, 게이소 출판사, 하쿠수이샤, 이와나미 등 8개 출판사에 2006년부터는 신요사(新曜社)가 참여하고 있다. 사이트를 통해 복간작을 예고하고 독자들이 신청한 도서를 종합해 최종 복간을 결정한다. 영어권에서는 에이어 컴퍼니(Ayer Company Publishers)가 ‘책의 형태로 남아 있어야 할 목록’을 정하고 재출간을 단행한다. 어떤 형식이든 언제라도 한국에서 가능한 형태로 보인다.
김현숙 편집장은 이런 재출간 붐에 대해 “쉽게 기획을 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자기 반성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한 문학 출판사의 편집자는 “판권을 보유한 출판사가 오랫동안 출판을 하지 않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다. 독자들의 기다림을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한기호 소장은 이러한 재출간 기획이 한 걸음 더 나갈 것을 요구한다. “한때 서점에 나가 있는 책 중 95%는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닌 적도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책이 정보의 제왕으로서 경쟁자가 없었다. 지금은 무료 정보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다. 새로운 물성을 탐구하고 책의 신체성을 새롭게 하는 재출간 기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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