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원작 속 ‘추한 엔젤’을 연민으로 감싼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녀가 꿈꿨던 삶? 그녀가 살았던 삶?”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의 마지막 대사다. 의 주인공 엔젤(로몰라 가레이)은 자신이 꿈꿨던 삶을 자신의 인생에서 이루려고 노력했고, 자신이 꿈꿨던 삶을 위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인했으며, 자신이 꿈꿨던 삶을 위해서 심지어 자신마저 속이는 연기도 서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두 개의 인생을 살았다. 인생 자체를 연기로 만들었던 여성의 이야기, 은 가난한 소녀의 꿈에서 시작한다.
영국 스타 작가 마리 코렐리가 모델
20세기 초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시골 마을 놀리에 사는 소녀 엔젤은 소설 쓰기에 심취했다.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한 엔젤에게 소설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환상의 여행이자 유일한 희망이다. 가난한 소녀의 곁에는 아무도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조차도 소녀의 꿈을 그저 허황된 희망으로 여긴다. 소녀가 자신의 상황을 견디는 방법은 자신을 무시하는 타인을 자신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더더욱 사랑받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의 재능을 믿고 끝없이 원고를 써서 런던의 출판사에 보내는 소녀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런던의 출판사에서 엔젤의 소설을 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엔젤의 소설은 잇따라 인기를 누리고, 엔젤의 인생도 바뀐다. 엔젤은 마치 요즘의 스타처럼 갑자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는다. 그리고 엔젤은 자신이 하녀로 들어갈 뻔했던 저택인 ‘파라다이스’를 사들여 거처로 삼는다.
꿈같은 성공을 이룬 엔젤은 꿈같은 사랑도 이루려 애쓴다.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화가 에스메(마이클 파스빈더)를 만난 엔젤은 첫눈에 반한다. 불행히도 에스메는 엔젤에게 반하지 않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 엔젤은 은근히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며 에스메에게 접근해 그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으로 엔젤의 곁에는 엔젤의 재능을 열렬히 흠모하는 노라(루시 러셀)가 있다. 에스메의 여동생인 노라는 엔젤의 비서 구실을 하면서 언제나 엔젤의 곁을 지킨다. 노라는 이기적인 에스메가 엔젤을 망칠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엔젤은 노라의 충고를 무시한다. 에스메와 결혼해 자신이 꿈꾸던 인생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믿을 즈음에 엔젤에게 시련이 닥친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리고 에스메가 참전을 위해서 집을 떠난다. 에스메의 참전을 다른 사람들은 에스메 인생에서 최초로 성숙한 선택이라고 여기지만 엔젤은 에스메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의 낙원인 파라다이스의 행복은 끝난다.
신데렐라 같은 성공을 얻지만 결국엔 몰락에 이른다는 의 이야기 구조는 1930~40년대 할리우드 고전 멜로영화를 닮았다. 프랑수아 오종은 빅토리아 시대에 고전 멜로영화의 구조를 대입했다. 일종의 시대극인 영화에서 오종의 악동 기질은 누그러져 보인다. 의 원작은 영국의 여성 작가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1957년 작품이다. 그는 영국 최초의 스타 작가인 마리 코렐리를 모델로 소설 을 썼다. 오종은 여성의 달콤씁쓸한 인생담인 에 매혹됐지만 원작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원작은 엔젤의 추한 면모를 강조한 반면에, 영화는 엔젤을 허영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린다. 오종 감독의 말대로 “혐오하면서 사랑하게 되는 캐릭터”인 것이다. 마치 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과거 꾸미고 남자에게 헌신하는 인생 개그 프로그램
엔젤은 그렇게 자신은 훌륭하고 자신의 인생은 아름다웠다는, 자신이 만든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뻔한 태생을 비밀에 붙이고, 어머니의 일생을 조작하지만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자신의 꿈에 맞춰 각색하지만 그것은 그의 꿈이 실현되는 방식일 뿐이다. 자신의 인생을 세탁하는 엔젤에 학력을 조작했던 우리 안의 엔젤도 겹친다. 그렇게 꾸며낸 일생을 살았지만 엔젤은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종은 이렇게 자신의 인생 자체를 연극으로 만들고 열심히 연기했던 여성을 혐오스러운 엔젤이 아니라 연민이 느껴지는 엔젤로 그려낸다.
오종 감독은 만드는 작품마다 전혀 다른 영화를 선보였다. 도 게이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와 전혀 다른 작품이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에서 오종의 이전 작품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다만 ‘여배우들의 감독’으로 불리는 그가 섬세한 시선으로 잡아낸 여성의 욕망은 여전히 생생하다. 에는 착취하는 남자와 헌신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에스메가 엔젤의 사랑을 이용해 엔젤을 착취하는 인물이라면, 노라는 엔젤에게 하염없이 애정을 바치는 인물이다. 엔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둘을 모두 놓지 않는다. 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곁에 잡아둔다. 엔젤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감정조차 적당히 모른 척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곁에 잡아두는 인물이다. 물론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그들의 감정을 은근히 이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노라뿐 아니라 엔젤의 소설을 내는 출판사 편집장 테오(샌 닐)도 그러한 이유로 엔젤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엔젤은 자신이 사랑하는 에스메를 향해선 무모할 정도로 애정을 쏟는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누군가를 갖지 못했던 엔젤은 누군가의 유일한 지지자가 되려고 애쓴다. 무명 화가인 에스메는 그렇게 한없는 지지를 받지만 엔젤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엔젤은 그렇게 번지수가 틀린 사랑을 했지만 결코 불행한 인물은 아니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애정을 바쳤던 여성의 비극이지만, 에는 은근한 기쁨이 스며 있다. 비록 거짓으로 가득 찬 인생일지라도 엔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의 부인인 헤르미온느(샬럿 램플링)는 엔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작가로선 형편없어요. 천박하죠. 하지만 여자로선… 감탄하고 있어요.” 자신의 환상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현실마저 뛰어넘은 여인에 대한 여인의 감탄이다.
늘 곁을 지키는 노라 통한 퀴어 코드
여전히 ‘악동’이라는 형용사를 달고 다니는 오종 감독은 에서도 퀴어 코드를 놓치지 않는다. 노라의 엔젤에 대한 헌신은 처음엔 황당하게 느껴지다 나중엔 서글퍼 보이지만 결국엔 가장 진실한 감정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 소설가와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 은 ‘당대에 인기 있는 스타가 되느냐, 후대가 인정하는 예술가가 되느냐’ 라는 예술의 가치에 대한 질문도 던진다. 절묘한 캐스팅과 안정된 연기는 의 힘이다. 1월24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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