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부서져도 끝까지 버텨 살아남는 ‘여자의 몸’ 보여준 영화 </font>
▣ 남다은 영화평론가
결론은 모두가 알고 있다. 19번의 동점, 연장전, 재연장전, 그리고 마지막 손에 땀을 쥐게 한 승부던지기.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투혼을 발휘한 그녀들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비인기 종목의 서러움이나 소속팀 없이 떠도는 자들의 생활고, 게다가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아줌마라는 정체성까지 그날의 경기 장면은 이 주변부의 외로움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시간이었다. 은 그런 이야기다. 여기에는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제대로 뛰기 위해 삶의 잡다한 고통의 순간들을 헤쳐나가는 질긴 여자들이 있다.
인간 승리·민족주의 스펙터클은 거부해
그런데 많은 리뷰들이 이 영화의 감동에 대해 말할 때, 이들은 그 감동을 영화 속 선수들의 마지막 경기 자체에서 찾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대개의 평들은 이 영화가 스포츠 드라마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무게를 싣고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하지만 도대체 휴먼 드라마라는 범주는 무엇인가) 영화 속 경기 장면들을 아줌마 선수들의 경기장 밖, 지난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만 만족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속 경기 장면이 예상보다 덜 치밀하고 역동적이지 않음을 지적하면서도 그걸 영화의 흠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서 핸드볼 경기는 결국 그녀들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극적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영화는 역경을 딛고 감동의 드라마를 선사하는 전형적인 휴먼·스포츠 영화의 진부함 속에 빠질 위험이 있다. 더욱이 2004년의 두근거리는 결승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 마지막 경기의 감동이 단지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사후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나는 이때 중요해지는 것이 몸이라고 생각한다. 승패도, 삶의 굴곡도, 공의 움직임도 아닌, 경기장에서 시간을 함께 견디는 몸들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보아야만 한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말해져야 하는 건 영화 전반에 걸쳐 구구절절이, 때로는 전형적인 틀 안에서 전개된 삶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 여자들이, 혹은 배우들이 만들어낸 경기 장면이다. 매스컴이 여배우들이 몸을 만들고 핸드볼을 익히기 위해 벌였던 힘겨운 싸움을 앞다투어 보도하면서도 정작 이들의 경기 장면을 별말 없이 지나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만약 이 영화의 핸드볼 경기 장면이 충분히 긴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이미 경기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보다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찍혔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속 경기에도 오심이 있고 그에 대한 반발이 있으며, 선수들의 부상도 있지만, 거기서 경기의 긴장을 자아낼 만한 갈등이나 쾌감 혹은 비극 같은 것은 없다. 중간중간 비쳐지는 전광판 시계와 1점 차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점수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아나운서의 해설이나 관중의 환호, 심지어 서울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응원하는 인파의 인서트조차 좀 심심하고 뜬금없게 느껴진다. 왜일까. 이 영화의 경기 장면에도 클로즈업이 있고 실제라면 불가능할 컷과 선수들을 가로지르는 핸드헬드가 있고 슬로 화면이 있지만, 그것이 두 팀의 긴박한 경기를 세련되게 재현해주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에는 이 마지막 경기를 스펙터클로 만들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재연장전·승부던지기 견딘 ‘아줌마’ 선수들
선수들이나 감독 중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하다못해 가족을 위해서 뛰어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인간 승리의 스펙터클, 민족주의의 스펙터클로 가는 쉬운 길을 거부한다. 영화는 선수들의 화려한 기술력이나 화려한 편집을 선보이는 대신, 연장전, 재연장전, 승부던지기의 긴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줌마’ 선수들의 부서지고 넘어지는 몸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이들이 막막한 시간 앞에 맨몸을 던져놓고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체력과 싸움을 벌일 때, 이들의 몸이 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대신, 한 선수와 다른 선수를 이어주는 내밀한 시선의 교환, 한 선수의 액션에 대한 다른 선수의 민감한 리액션에 주의를 기울이며, 거기서 승패를 넘어서는 정서를 발견한다. 예컨대 영화의 마지막, 승패를 가르는 승부던지기에 실패한 문소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골대를 벗어난 공에서 승패의 순간을 찾는 대신, 문소리 뒤로 한편에서는 환호하는 덴마크 선수들의 모습과 다른 한편에서는 슬퍼하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포커스아웃으로 담는다. 그녀가 차마 골대를 보지 못하고 뒤돌아 주저앉자, 그 선수들이 흐릿한 화면을 뚫고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드러내며 문소리에게 다가와 부둥켜안는다. 오직 소진된 몸만으로, 서로의 몸에 반응하고 의지하며 함께 시간을 견뎌낸 자들에게만 허락된 감동. 묘한 건 그 감동이 영화 내부의 선수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밖의 여배우들과 오버랩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성형을 하고 사회의 용서를 구해 진정한 미녀로 거듭나거나, 한없이 아름다운 외모를 안쓰러울 정도로 의도적으로 망가뜨려 대중의 칭찬을 구하는 배우들 틈에서 의 배우들은 스스로를 억지로 훼손하거나 미화하지 않고도 건강하게 빛나는 법을 보여준다. 이들의 단단한 허벅지와 팔뚝이 겁없이 코트를 뒹굴고 하늘을 향해 마음껏 점프할 때마다, ‘여배우의 몸’을 둘러싼 어떤 억압된 균질성이 해방되는 순간의 쾌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미리 연출된 동선이 있었겠지만, 여기에는 분명 그 어떤 연출도, 카메라도 컨트롤할 수 없는 몸의 우연한 튀어나감, 그러니까 의도된 연기를 어느 순간 벗어나버린 듯한 몸의 자유로운 역동성이 스쳐간다. 보여주고 전시하기 위한 매끈한 몸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고 무언가를 하며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는 땀 흘리는 여자의 몸. 그걸 강인한 생존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그런 몸에 대한 매혹이 있다. 나는 임순례 감독이 에서 혹은 에서보다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 오롯이 배어 있는 그녀와 여배우들의 땀방울과 눈물에는 진심으로 따뜻한 존중을 표하고 싶다. 1월10일 개봉한다.
▶세금 먹는 하마, 거대한 놈이 온다
▶민노당, 혁신이냐 분당이냐
▶당신의 일상을 탐닉하라
▶나는 비주류, 최선을 다해 부딪히기
▶쉽게 눈 못 뗄 대장정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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