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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박수근 작품, 문화재 지정 유력

등록 2008-01-11 00:00 수정 2020-05-03 04:25

근대회화 문화재 등록을 준비 중인 문화재청, 김환기 ·박수근 등 최종 후보 56점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그냥 명품 아닌 진짜 문화재를 보러 간다.’ 올해 하반기부터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같은 근대미술 거장들의 작품 전시장에서는 이런 말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미술 교과서와 대형 전시로 국민들에게도 낯익은 20세기 초·중반 한국 저명 근대화가들의 걸작 그림들이 나라가 인정하는 공식 문화재가 된다.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이중섭의 황소 그림, 바위의 질감이 묻어나는 박수근의 시골 풍경, ‘조선의 고갱’으로 불렸던 천재화가 이인성의 목가적인 유화 풍경, 한국화의 양대 거봉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의 산수, 풍경화 등이 정식 문화재 지정이 유력한 후보작들이다.

“첫 등록할 10여 점 우선 선정할 것”

문화재청이 최근 근대회화 작품들을 근대건축물처럼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리기 위한 마무리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의 용역을 받은 근대미술사학회(회장 김영나 서울대 교수)는 지난 연말까지 근대미술품의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한 기본 목록 사업을 완료하고, 문화재청에 최종안 격인 400여 쪽 분량의 목록자료집을 1월 중순 안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목록집과 보고서를 문화재청에 제출하면, 관련 자료들이 문화재위원회에 넘겨진 뒤 근대분과 위원들의 심의를 검쳐 올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인 등록문화재 지정을 위한 작업이 시작될 전망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쪽은 “목록집의 작품 중 미술사적 가치가 두드러진 10여 점에 한해 우선 등록문화재로 선정할 계획을 잡아놓았다”고 밝혔다. 유명세에 비해, 국가적 차원에서 미술사적 평가와 관리조차 받지 못했던 우리 근대미술품들이 본격적인 공공 차원의 보존 관리 시스템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최근 박수근, 이중섭 등 국내 근현대 그림 대가들이 남긴 작품을 놓고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근대 명작들의 문화재 등록은 명확한 작품 기준작을 세우는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근대미술품의 공공적 가치를 대중에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근대미술사학회는 1993년 출범한 학술단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근대미술사를 탐구해온 연구자 모임이다. 이 학회에 문화재청이 ‘근대미술문화재 목록화 사업 기획안’을 용역 발주한 것은 지난해 6월. 근대건축물, 산업시설, 생활사 유물 등에 이어 회화를 필두로 한 근대미술 유산도 근대 등록문화재에 포함시키려 하니, 후보가 될 만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조사해 현황을 파악한 목록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었다. 학회 쪽은 동양화분과, 서양화분과, 총괄연구팀으로 나눠 3800여만원의 예산지원을 받으면서 극비리에 후보작 선정작업을 진행해왔다. 회장인 김영나 서울대 교수는 “문헌과 도록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20세기 초부터 50년 전 시점인 1957년까지의 작품들을 망라한 결과 1천 점 이상의 작품이 조사됐다”며 “이번에 나오게 될 목록집은 그것을 서너 단계를 거쳐 추린 문화재 최종 후보작 56점의 도판과 소장처, 작품 내역 등의 정보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선정팀에는 문화재청 전문위원인 김현숙 박사와 권행가 박사(이상 홍익대 강사),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미술평론가 최열씨 등이 관여했으며 회장인 김 교수와 원로 미술사가 이구열씨, 미술평론가 오광수씨, 윤범모 동국대 교수 등이 자문과 감수를 맡았다.

작가 1인당 3~4점까지만 후보작 제한

목록집은 ‘근대문화유산 회화분야 목록화 조사보고서’와 같이 전달된다. 가장 주목되는 최종 목록에는 모두 56점이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양화가 36점, 한국화가 20점이다. 목록의 서두는 양화의 경우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 고희동의 부채를 든 청년기의 , 한국화의 경우는 근대 화단의 기틀을 세운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의 같은 경물, 산수화가 자리를 차지한다. 뒤를 이어 이인성, 이상범, 변관식, 장우성,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김인승 등 대가들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들어 있다. 당장 근대 문화재 지정이 유력한 작품은 박수근의 50년대 수작인 (개인 소장), 이중섭의 (홍익대 미술관 소장), 김환기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인성의 , 구본웅의 등이 언급되고 있다. 한국화로는 소림과 심전의 작품 외에 을 비롯한 변관식의 금강산 산수, 이상범의 한국적인 전원 풍경, 심산 노수현의 산수 등이 추천됐다. 작가 1인당 많아도 3~4점까지만 후보작을 제한했다. 실무를 맡은 연구자 권행가씨는 “최종 목록에 오른 56점은 학회 실무자는 물론 자문을 맡은 원로 중견 연구자들도 이론 없이 추천한 것들로 소장처가 확실하고 예술성, 사료성도 인정받는 작품들”이라며 “등록문화재 지정이 유력한 후보작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번 목록화 사업은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등록문화재 제도를 시행한 건축 분야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등록문화재는 2001년 건축유산 중심으로 도입된 이래 산업시설, 생활사유물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는 추세다. 2006년에는 구한말 순종의 전용 자동차, 지난해에는 40~50년대 등의 영화 필름 7종이 지정되어 눈길을 모은 바 있다. 특히 근대 명작 그림의 등록문화재 사업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2004년 취임 당시부터 내심 목표로 삼았던 부분이다. 유 청장은 그해 말 언론 대담에서 “근대미술 명품 등에서도 보물, 국보가 나올 수 있도록 공청회 개최, 심의기구 구성 등을 생각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근대문화상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 문화재 못지않게 중요한데도, 그동안 저급한 장르라는 무관심 속에 많은 근대미술품들이 훼손·멸실의 위험에 방치됐다는 게 큰 명분이 됐다.

등록돼도 매매·재산권 제약은 없어

근대 등록문화재 제도는 국보나 보물처럼 국가가 강제 관리하는 게 아니다. 건축유산처럼 문화재 등록에는 소장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관리 상황이나 소장처의 변동 등을 문화재청에 통보하는 것이 원칙이나 매매 거래가 자유롭고, 재산권 제약도 없다. 다만 작품이 훼손의 위험에 처했을 경우 당국에 신청하면, 보존·수복 비용을 지원해준다. 세제상 혜택은 거의 없으나 지정되면 금전 가치가 크게 뛰는 만큼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는 소장자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보존·수복 등에 국가 지원을 받을 경우 소장품 관리에 외부 간섭을 피할 수 없어, 일부 소장자들은 작품을 더욱 숨기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학회 실무자인 김현숙 박사는 “이번에 빠진 조각·공예 등 다른 예술 장르의 선정 기준도 과제로 남아 있고, 연구자마다 작품을 보는 관점이 엇갈리는데다, 김기창·장우성 등 친일 논란이 일었던 대가들의 작품은 문화재 등록 기준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의 강흔모 사무관도 “근대미술품의 지위는 높아지겠으나, 선정 과정의 공정성 여부를 둘러싼 미술계 내 불협화음, 위작 시비 등도 예상된다”며 “올해 첫 등록 때는 엄격한 기준 아래 10여 점 정도만 선정하고, 점차 지정 범위를 넓혀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 쪽은 문화재위 심의가 끝나는 대로 800점이 넘는 목록집의 초기 조사 당시 작품 참고 목록을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공개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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