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바리’ 기다리다 미친 한국적 상황 잘 드러낸 영화
▣ 황진미 영화평론가
는 한국적 특수성과 현실성이 돋보이는 ‘토착’ 로맨틱 코미디이다. 영화는 다중 플롯임에도 탄탄한 시나리오 덕분에 산만하지 않으며, 플롯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애의 윤리를 제시한다. 또 ‘군대’라는 가장 ‘남성적’인 화두에서 출발하지만, 영화는 군대간 남자가 아닌 그들의 여친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그들의 관계는 남성 우위적이지 않다. 영화의 세 가지 미덕을 요약하면, 첫째 현실에 기반을 둔 ‘토착’ 장르이고, 둘째 잘 짜인 다중 플롯을 통해 연애의 윤리를 드러내고, 셋째 성정치학적 진보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휴가 땐 카드대금, 면회가선 하룻밤…
첫째는 현실에 기반한 토착 로맨틱 코미디로서 는 한국적 특수성에 기반을 둔다. 일단 소재가 매우 한국적인데, 세계에서 징병제를 취하는 75개국 중 북한, 이스라엘, 베트남 등 30개국만이 24개월 이상 복무하며, 그중 사병 월급이 5만원밖에 안 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즉,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의 2년 동안 남친을 무보수의 ‘군바리’로 보내놓고 ‘기다리다 미치는’ 여자들은 한국 외에는 없다. 영화는 남친을 군대에 보낸 여자들의 사회경제적, 심리적 상태를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직장녀인 누나(손태영)는 남친 휴가 때 쓴 카드대금이 걱정이고, 근처에 얼쩡거리는 직장남이나 결혼정보업체에도 슬쩍 눈이 간다. 밴드 보컬(오미연)은 남친(데니안)이 입대도 하기 전에 마음을 접고, 후배(장희진)는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면회를 가는 용기를 낸다. 여고생(한여름)은 같이 살던 오빠(우승민)가 입대하자마자 동거남을 들여 월세를 내게 하고, 여대생(유인영)은 남친의 공백을 채워주던 남친 친구(이기우)와 동침한다. 이런 사연들은 남친을 군대에 보낸 한국 여자들의 보편적 경험담을 재구성한 것으로 매우 현실감이 높다. 생각해보면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한국적 특수성’이나 현실성은 거의 추구된 적이 없다. 할리우드나 영국 ‘워킹 타이틀’ 영화를 전범으로 삼는 탓에, 정서에 맞지 않은 상황 묘사나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의 과장된 행동도 장르의 특성인 양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이 영화처럼 다중 플롯을 취하는 은 4차원적인 정서에 현실감과 구체성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두 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여자 좋아하는 선배에게 다가가는 여자 후배’ 에피소드를 비교해보면, 은 술 마시기를 단순 반복하다가 남자 혼자 깨달았다며 말로 때우는 반면, 는 휴가, 면회에서의 하룻밤, 공연 등 미묘하고 구체적인 상황들을 쌓아올려 둘의 긴장이 자연 발화되도록 묘사한다. 는 한국이라는 토양에 사실성과 구체성의 두 발을 딛고 선 ‘토착 로맨틱 코미디’로서 그간의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을 쇄신한다.
스타 등장시키지 않고도 스타성 창출
둘째는 다중 플롯에 녹여낸 연애의 윤리다. 영화는 네 쌍의 인물들을 고루 안배하면서도 치밀한 플롯을 통해 1명의 인물을 부각시키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애의 윤리를 드러낸다. 남자 4명의 여친 중 1명은 훈련소에 나오지 않았고, 2명의 여친과 1명의 여자 후배가 훈련소에 따라왔다. 그들 중 현장에서 펑펑 울던 여친은 돌아가는 버스에서부턴 멀쩡해져서 며칠 만에 나이트에서 새 남친을 사귀어 같이 산다. 버스에서부터 울기 시작한 여친은 온갖 애교 섞인 선물을 보내지만 몇 달 만에 남친의 친구와 사귄다. 훈련소에 나오지 않았던 연상녀는 가끔 딴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갈수록 관계가 소원해지지만 연하남과의 신의를 끝내 지킨다. 그들 중 끝까지 유지된 커플은 가장 덜 격정적으로 보이던 연상-연하 커플이다. 한편 보통 연인들에겐 암흑기인 2년 동안 새로 사랑을 꽃피운 커플도 있다. 입대 전엔 그냥 후배였던 그녀는 여자로도 보컬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2년 동안 연인이자 보컬로 성장한다. 그녀는 음식을 싸서 면회를 갈 때나 남친을 군대 보낸 여성들의 ‘곰신’ 사이트 채팅을 할 때나 오디션을 볼 때 성심껏 상대를 배려한다. 영화는 인물들을 고루 안배하면서도 플롯에 의해 한 인물을 ‘흙 속의 진주’로 부각시키며, 그녀를 통해 관계의 윤리를 제시한다. 또한 캐릭터와 더불어 배우 장희진 역시 ‘흙 속의 진주’로 발굴되는데, 등 스타 캐릭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최근의 로맨틱 코미디들과는 달리, 스타를 등장시키지 않고도 플롯 내부로부터 스타성을 창출해내고 이를 영화의 주제와 일치시킨다.
셋째는 성정치학적 진보성으로, 영화 속 커플들은 남성 중심적 관계가 아니다. 첫째, 연상녀는 데이트 비용을 전액 부담하고, 이를 미안해하는 남친이 송금한 소액에 감동한다. 그녀는 예전에도 입대 전 연하들을 사귀었고, 직장남의 부조금을 당장 갚겠다 할 만큼 남자들에게 경제적 의존을 기대하지 않는다. 둘째, 여고생이 먼저 남자에게 입주할 것을 제안하고, 같이 살면서 요리는 남자가 한다. 셋째, 여자는 자신과 동침한 친구를 때리는 남자에게 “난 네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한 것”이라 말한다. 남자들 사이에서 쟁탈되는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넷째, 후배는 선배와의 첫 섹스 직전에 자신이 준비해간 콘돔을 사용하길 요구한다. ‘내숭 권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자는 섹스에 대해 모르는 척해야 한다. 그러나 양성평등 관계에서 콘돔 권유는 자연스럽고 현명한 행동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청춘남녀 누구나 공감할 토착 로맨틱 코미디 는 단순한 군대 이야기 모음집이 아니다. 입영으로 인한 ‘단절의 시간을 대하는 관계의 윤리’에 관한 영화이자, 진보적 이성애 관계의 모델을 제시하는 신선한 연애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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