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판매 만화잡지’ 〈sal〉 2호 ‘출판기념회’… 인디 경향을 주도하는 ‘생활 캐치’ 만화들 엿볼 수 있어
▣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살’을 만나러 가는 길은 가팔랐다. 서울 금호동 교회 옆 계단길은, 확인 안 됐으나 서울에서 최고 급경사, 역시 확인 안 되니 질러 말하자면 전국 최고 급경사. 길이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길은 사람에게 내주고 차는 돌아간다.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고 나서 좀더 걸어야 〈sal2〉 출간 축하 모임 장소가 나온다. 만화가 김수박의 집이다. 집 안의 계단도 나선 모양으로 돌아간다. 한때는 비탈이 집 안에 들어온 집에 살았던 그가 그나마 허리를 펴고 살게 된 집이다. 난방은 잘된다. 안 그래도 10명의 만화가들이 모인 집은 열기로 후끈하다. 집주인과 권용득, 앙꼬(최경진), 백종민, 김성희, 마영신, 정남선, 박형동, 유창창(유창운), 박윤선씨가 금방 〈sal2〉와 대면식을 가졌다. 넓은 창문 아래로 올라온 길들은 사라지고 불빛들이 알알하다.
메모, 엽서, 그림… 작가들의 ‘서비스 경쟁’
〈sal〉은 만화가들이 모여 만드는 ‘통신판매 만화잡지’다. 이번에 2호가 나오면서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됐다. 1호에서 약속한 대로 1호의 수익금은 모두 2호를 제작하는 데 쓰였다. 남은 돈은 1호 작가가 아니라 2호 작가에게 원고료로 지급됐다. 행사의 맨 처음에는 원고료를 지급하는 ‘지엄한’ 순서가 있었다. 수익금을 참가 작가의 수대로 나눈 액수는 1만원이다. 어쨌든 ‘흑자’다. 〈sal2〉의 판매 수익금은 책에 고지된 대로 ‘다음 봄이 좋겠다’는 3호를 만드는 데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수익금은 3호에 참가한 작가에게 원고료로 지급될 것이다.
2007년 4월에 나온 ‘노란색’ 〈sal〉과 12월13일 나온 ‘하늘색’ 〈sal2〉까지는 ‘엄청난’ 성장이 있었다. 먼저 참여 작가가 늘었다. 1호에 참가한 김수박, 권용득, 앙꼬, 백종민, 김성희, 최은영(아롱), 마영신, 서재원, 정남선은 한 명도 빠짐없이 2호로 옮긴데다 박형동, 유창창, 박윤선, 송아람씨가 추가로 참가했다. 페이지도 150에서 212로 60페이지가 늘었다. 가격은 6900원에서 8900원으로 올랐다. 무엇보다 인쇄 부수가 늘었다. 200부가 400부로 ‘무려’ 두 배 늘었다.
책은 작가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통신판매’된다. 8900원의 가격은 등기요금 1100원을 더하면 에누리 없이 1만원이 되는 ‘교묘한’ 가격이다. ‘통신판매’는 매력적이었다. 2호의 편집과 디자인 등 실무를 맡은 권용득은 〈sal2〉 앞글에 이렇게 썼다. “‘살북 주문합니다’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의 낯선 문자가 온다. 그럼 나는 내게 살북을 부탁한 모르는 번호의 그 낯선 사람에게 나만의 메모를 하고, 버스 두 정거장쯤의 거리에 있는 우체국까지 걸어가서 책을 보낸다. 이 일련의 과정이 귀찮은 일이 될 줄만 알았는데, 하다 보니 그렇게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살북은 신속하고 정확한 거래는 아니더라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 못지않게 사람의 마음도 봄처럼 설레었다.”
출판기념회의 마지막 행사는 400권을 n분의 1로 나눠 가져가는 것이다. 각 만화 작가들은 각개전투로 주문을 받고 우편으로 부친다. 만화가들은 자연스럽게 ‘서비스 경쟁 체제’로 돌입했다. 책을 보낼 때 김수박은 엽서를 썼고 권용득은 메모를 쓰고 김성희는 그림을 그려주었다. 단 하나의 ‘추가옵션’ 없이 독자에게 간 책은 한 권도 없었을 것이다. 김수박씨는 말한다. “작가들이 직접 사는 사람들과 일대일로 만나는 거잖아요. 부칠 때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작가는 거기에 답을 하고 부쳤다고 말하고 받은 사람은 받았다고 글을 남기고 읽고 나서 글을 남기고…. 출판사에서 책을 낸 것과 많이 달라요. 책을 하나 사는 것을 넘어서게 되죠. 이런저런 감정이 생겨나요.”
실험 만화에서 자기반영적 만화로
〈sal〉은 술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권용득이 서기를 자청해 술 취해 한 말들을 적어놓는 바람에”(김성희·1호 앞글) 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잡지의 제목을 뭘로 할까도 세 번의 술자리를 거치는 와중에 완성됐다. ‘협궤열차’ 등 여러 개가 제안됐지만 ‘속살’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김성희씨가 그냥 ‘속’을 빼버리고 ‘살’만 남겼다. 그걸 영어로 쓰고 났더니 책을 본 사람들이 하나씩 의미를 더 보태갔다. 자전거 살이다, ‘살’ 책이다, ‘쌀’이다 등등.
〈sal2〉에는 작가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가 많다. 〈sal〉도 그랬다. 만화를 보면, 사실과 멀어지기도 했겠지만 비슷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신혼인 김수박은 아내와 놀러가는 이야기를 환상과 섞어 버무렸고(‘잠만 자고 싶어’), 김성희는 어머니가 젊은 날 취미로 했던 스킬자수를 떠올린다(‘어머니의 텃밭’). 필리핀에서 돌아와 새까맣게 탄 앙꼬는 맘대로 살다가 “매일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획표를 짠다(‘나의 하루’). 서재원은 외국의 외딴 곳에 머무르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순간을 그렸다(‘Eve in the Wolfsburg’). 정남선은 라면을 끓여먹고 잠을 자며 고향에서 어머니와의 만남을 떠올리고(‘어떤 휴일’), 권용득은 만화를 그리면서 어떤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고 건다(‘“우리 얘기 좀 해요” 투’). 마영신은 불알친구들과 술자리에서 고등학교 시절 엇갈린 사랑을 떠올린다(‘이팔청춘’). ‘리얼리즘’ 만화가 아닌 것도 꽤 된다. 최은영은 머리를 자른 뒤 마음이 두근거리는 고등학생을 그리고(‘바람머리’), 송아람은 ‘애인’이라 불리는 단골 레코드 가게 아저씨 때문에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중학생을 그린다(‘My Penny Lane’). 컬러 작업을 주로 하던 박형동은 흑백으로 고양이로 인해 이별을 잠깐 미루는 커플(‘스노우 라이딩’)을 그렸고, 유창창은 창문과 새장을 바꾸는 사람 등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한 쪽짜리 만화 두 편을 담았다. 백종민의 ‘‘비선형 동역학’과 누더기 도사’, 박윤선의 ‘밤의 문’은 독특하고 잔잔하다.
〈sal2〉의 대부분을 채운 ‘자기반영적 만화’들은 최근 인디만화의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새만화책 대표 김대중씨는 “특별히 우리 작가들이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서구에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깊이가 덜한데, 우리는 사회나 역사 등 보편적인 이야기까지 끌어들이면서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가 대표로 있는 만화출판사 새만화책은 이런 경향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처음 시작하는 작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라고 권한다. “길게 보면 자기 얘기를 한다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맨 처음 만화를 그리면서 작품의 태도를 설정하는 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만화는 중요하다.”
이러한 자신과 가족, 주위 사람을 소재로 소소한 묘사를 주로 하는 만화는 1990년대 후반 ‘인디만화’의 경향과는 대별된다. 당시 처음으로 ‘인디만화’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쏟아져나왔던 만화들은 주로 ‘실험적인 만화’였다. 동호회로 활동했던 네모라미나 만화실험 봄 등은 그림체와 색깔에 파격을 가하고 색다른 동물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렸다. 인디만화를 새롭게 주도하는 ‘생활 캐치’ 만화가 〈sal2〉를 채운 것에 대해 김성희씨는 “이런 만화를 그린다고 모인 것은 아닌데, 모이고 나니까 이런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많더라. 만화 활동은 열심히 하지만 상업성은 떨어지니까 출판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 이런 만화가 모인 이유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만화들은 알음알음으로 인지도가 꽤 높아졌다. 한 대중만화잡지의 기자는 “〈sal〉의 작가들을 눈여겨보고 있고 계속해서 작업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얼굴을 찾는 잡지사, 출판사, 기획자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작가들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씨도 “만화책이 나왔을 때의 반응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sal2〉도 두 배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직접 다가가는 가파른 길
가파른 길은 지름길. ‘살’을 만나러 가는 길은 가파르다. 만화작가들은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길을 택했다. 그들의 만화가 원래 ‘살’을 부비는 만화였다. ‘살’ 홈페이지<u>(http://blog.naver.com/salbook)</u>에 가면 수록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살’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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