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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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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험한 신물’의 무(모)한 도전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배용준·김종학·송지나의 초인적 능력에만 의존한 , 완성도를 지켜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 강명석 〈매거진t〉 편집위원

“태왕군은 4만, 적은 10만. 비록 반이 안 되는 병력이었지만 태왕군의 사기는 드높았다.” 문화방송 에서 고구려의 사관(史官)은 담덕(배용준)군과 호개(윤태영)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이는 광경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는 사관이 기록한 고구려의 역사일 뿐 드라마 의 역사가 아니다. 담덕과 호개의 전투는 4만 대 10만이 아니라 수백의 엑스트라가 바쁘게 뛰어다니는 국지전일 뿐이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대규모의 군대는 두 군대가 맞붙기 전 서 있는 상태에서 몇 컷만 보이고, 전투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각각의 캐릭터를 가까이 잡으며 개개인의 액션만 강조한다. 에는 영화 의 ‘왕의 귀환’에서 보여준 대전투의 스펙터클은 없었다. 심지어 두 군대가 충돌하기 직전,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린 군대의 대부분은 뒤에 ‘서 있고’, 그중 일부만이 진군한다.

준비기간 3년, 촬영 직전까지 대본 완성 못해

말로 4만과 10만 군대를 처리하는 4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 드라마. 400억원을 들여 담덕이 네 개의 신물을 모아 쥬신의 왕이 된다는 의 기획은 과 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실상 는 SBS 같은 작품들의 문제를 그대로 반복했다. 시간에 쫓긴 대본은 갈수록 허술해졌고, 결국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황당한 엔딩은 일부 시청자의 ‘마지막회 재촬영’ 요구로 이어졌다. 400억원의 자본도, 여배우들마저 기죽게 한다는 미모로 시청자를 홀린 배용준도 하루 만에 컴퓨터그래픽으로 10만의 군대를 만들 수는 없었다. 작가는 마지막회 촬영 직전까지 대본을 완성하지 못했고, 연출자는 현장에서 임의로 대본을 수정해 ‘대본과 다른 엔딩’을 만들어야 했다. 이는 전 아시아에 수출할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제작진의 야심이 용기이자 무모한 도전이었던 이유다.

400억원을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는 지금 한국 드라마 산업에서 영험한 신물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으로 제작됐다. 400억원의 자본이 들어온 것은 일본을 움직이는 배용준의 힘이 절대적이었고, 400억원짜리 판타지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것은 문화방송 부터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드라마를 만들었던 김종학 PD·송지나 작가의 역량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는 400억원이라는 자본과 수많은 해외 촬영과 대규모의 전투신, 그리고 컴퓨터그래픽을 복합적으로 다뤄야 하는 의 제작 과정에 걸맞은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3년의 제작 기간 동안 결국 대본은 완성되지 못했고, 제작진은 400억원의 자본과 현재 한국의 컴퓨터그래픽 기술, 그리고 제작 기간에 걸맞은 이야기 대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나 가능할 규모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에는 수만의 군사와 동북아시아 전체를 오가는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실제 액션은 이야기 규모에 비하면 오히려 소박하다. 담덕은 수만의 군대를 지휘하는 대신 늘 거리에서, 혹은 벌판에서 육박전을 벌여야 하고,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진행되는 고구려군의 전황은 사관의 기록으로, 거믈촌 제자들이 전달하는 서신으로만 전달된다.

에서 어떤 세력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그 행동을 담은 영상이 아니다. 대신 그것들은 거믈촌의 촌장(오광록)이나 용병집단의 대장 주무치(박성웅), 호족의 족장 흑개(장항선)처럼 각 세력을 대표하는 캐릭터의 행동으로만 표현된다. 그들이 적을 물리치고 오면 적을 이긴 것이고, 그들이 담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그 세력 전체가 충성을 맹세한 것과 같다. 사전 제작은커녕 제작 시간에 허덕인 에서 담덕이 그들 세력 전부를 둘러보며 명령을 내리는 스펙터클은 존재할 수 없다. 담덕은 궁 안에서 보고를 들을 뿐이다.

캐릭터가 강조된 에피소드의 비장미

그러나 지금의 가 그래도 시청률 30% 이상을 기록하고, 일본에서도 극장 상영을 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 ‘맨파워’ 때문이다. 김종학·송지나·배용준의 삼각편대와 400억원의 자본, 그리고 한류의 힘은 를 화천회 대장로(최민수)처럼 불사의 존재로 만들었다. 문화방송은 의 제작 지연으로 몇 개월 동안 편성에 차질을 빚었음에도 방영 첫 주에 주 4회 편성까지 하면서 를 홍보했고, 편집을 완성치 못한 드라마를 위해 를 20분 더 방영했다. 문화방송 경영인협회보가 의 종영과 함께 “가 보통의 드라마보다 더 벌어다주었을 광고수익의 총합은 아마도 저작권을 가진 김종학 프로덕션에 돌아가는 만큼의 해외수익 손실을 뛰어넘을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그룹으로서의 문화방송의 위상, 편성권자로서의 결정권, 시청자의 신뢰, 다른 기획 드라마의 가능성 등을 모두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지적한 것은 진실이다. 문화방송 역시 이 거대한 드라마를 상식적으로 제어할 시스템이 없었다. 물론 의 ‘맨파워’는 이 드라마가 온갖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일본의 극장과 위성방송에 동시에 걸리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배용준은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그의 매력을 발산시켰고,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PD의 ‘이상한’ 콤비 플레이는 에 독특한 매력을 발산시켰다. 송지나 작가는 쥬신 제국의 영토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나 담덕을 중심으로 한 수지니(이지아)와 기하(문소리)의 멜로라인은 대부분 대사로 때우고, 그 남는 시간 동안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가 인상적인 순간을 보여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만든다. 단역에 가까운 백제 왕마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임금으로 묘사되며 그 신에서만큼은 담덕 못지않은 인상을 남긴다. 이 때문에 는 스토리의 일관성은 떨어지지만 캐릭터가 강조된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는 비장미를 강조하고, 김종학 PD는 스토리의 전개와 상관없이 멋진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데 집착한다. 20분 지연 방송된 23회에서마저도, 김종학 감독은 담덕과 호개의 격투신에서 끊임없이 낙엽을 흩날리며 화사한 영상을 보여준다.

드라마 이후가 걱정스럽다

그래서 는 스토리의 부실함과 별개로 담덕을 보는 재미로, 그리고 고화질(HD) 화면에서 펼쳐지는 고급스러운 미장센을 보는 재미로 즐길 수 있는 드라마다. 시스템 없는 사람의 문제를 세 사신의 힘으로 어쨌건 끝내버린 드라마. 그러나 이 세 사람의 힘은 이후가 걱정되는 이유다. 가 3년의 제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20여 분의 시간이 모자라 애태우고, 주연 배우가 촬영을 끝내자마자 각종 부상으로 입원한 드라마로 마무리되면서, 결국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이만큼의 대작을 사전 제작할 기회는 또다시 사라졌다. 만약 드라마 업계의 ‘반인반신’ 배용준이 없다면 어떤 투자자가 마지막회가 방영되는 순간까지 가슴 졸여야 하는 드라마에 몇백억원을 투자할 것이며, 20여 년 동안 손발을 맞춰오며 제작 시스템 대신 김종학 프로덕션의 박창식 이사의 말대로 “눈빛만 봐도 안다”는 감으로 제작하는 김종학·송지나 콤비와 김종학 프로덕션이 아니면 누가 이런 드라마에 손을 댈 수 있을까. 는 아시아 전역에 승부를 걸 수 있는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 그것은 마치 개인의 초인적인 능력 하나로 태왕의 나라를 만든 담덕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드라마에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도를 지킬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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