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13집 〈The Third Place〉들고 돌아온 보헤미안 싱어송라이터와의 만남</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이상은이 돌아왔다. 13집 〈The Third Place〉로 돌아왔다. 이상은의 명반으로 꼽히는 의 프로듀서 이즈미 와다와 함께 돌아왔다. 7년 만의 음악적 해후다. 오랫동안 이상은 음악의 동지였던 다케다 하지무도 음반에 힘을 보탰고, 11집과 12집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이병훈(VOY)도 편곡자로 가세했다. 어느새 13집, 어느덧 37살. 참여자의 면모로도, 음악적 결과로도 13집은 이상은 음악의 (중간) 종합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상은의 팬들은 물론 을 좋아하는 대중도, 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저마다의 추억을 되새길 만한 노래들이 13집에는 들어 있다. 하기야 23살의 이상은은 일찍이 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그대로”라고.
“나의 음악적 아버지, 와다씨를 찾아”
그러니까 (11집)을 겪고, 〈ROMANTOPIA〉로 갔던 이상은이 〈The Third Place〉로 돌아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어딘가는 오랫동안 이상은 음악의 영토였다. 그러니 이것은 귀거래사. 애초에 그에게 은 “아무도 없”는 곳이었으니 그의 음악적 고향이 육체가 태어난 곳만일 이유는 없다. 그의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 이상은 혹은 리채(Lee-Tzsche)인 것처럼. 한국과 일본, 최소한 두 개의 음악적 영토를 가졌던 이상은 혹은 리채에게 13집 음반의 ‘로케이션’인 오키나와는 제3의 공간으로 어울려 보인다. 〈The Third Place〉는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일본 속의 외국 오키나와에서 만들어졌다. 그곳은 동북아의 코즈모폴리턴을 지향해온 이상은이라는 에게 위무의 섬이었다. “어딘가 묻히고 싶다면 우리가 없는 평화로운 섬으로 가서 마음을 놓고 쉬는 거야.” 스물다섯의 이상은이 에서 일찍이 노래했던 것처럼. 그는 오랜만에 음악적 스승을 만나서 몸은 지옥 같은 나날을 겪었으나 마음만은 천국처럼 편안했다고 말했다.
<font color="#216B9C">왜 오키나와가 제3의 공간(The Third Place)으로 선택됐나?</font>
와다씨가 오키나와에 산다. 일본도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음악이 무척 상업화됐다. 좋은 아티스트들은 모두 인디로 가야 했다. 와다씨도 그때 도쿄가 싫다고 오키나와로 갔다. 소속사 대표였던 와다씨가 떠나면서 나도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0년 한국에 와서 두 장의 음반을 내고 7년을 보냈다. 내가 주도를 해서 만들어봤으나 왠지 자꾸 옛날이 그리웠다. 용기를 내서 와다씨에게 부탁했다. 좀더 작품성 있는 음반을 만들고 싶은데 혼자서는 부족하니 도와달라고. 내게는 음악적 아버지 같은 분이다.
<font color="#216B9C"> 오키나와의 공간적 매력도 있었나.</font>
물론이다. 와다씨는 ‘도쿄와 서울은 이제 카오스다, 여기를 봐라’ 그렇게 말한다. 거기에 안 갔으면 모를 텐데…. 오키나와가 특이한 곳 아니냐. 얼마 전 교과서 시위를 봐도 그렇고. 홍길동의 율도국이 오키나와라는 설도 있고. 알수록 매력이 있었다. 나도 여자 홍길동이 됐다고 가정해보자, 그랬다.
<font color="#216B9C"> “오랜 옛날 한 청년이 배를 타고 흘러흘러 작은 섬, 남쪽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네.” 홍길동 청년의 얘기는 13집 수록곡 에도 나온다. 노래에도 그런 심정을 담았나.</font>
나는 여기(한국)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형을 형이라, 동생을 동생이라 부를 수 없는 신세구나, 이런 마음이 있었다. 메이저로 들어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인디의 뮤지션이 되기도 그렇고. 그래서 제3의 길을 찾았다. 그것이 와다씨, 오키나와였다.
<font color="#216B9C"> 이번 음반이 하나의 매듭인가.</font>
와다씨가 친구인 YMO(1978년에 결성된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전설적 그룹, 류이치 사카모토가 최연소 멤버였다) 멤버에게 상은이가 37살에 13집 음반을 내는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자기 클래식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껏 해왔던 것을 자기 언어, 자기 도량으로 종합할 시기라는 것이다. 와다씨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font color="#216B9C"> 이상은 음악의 정서도 그렇고, 이번 음반의 느낌도 ‘편안한 애절함’이라고 생각한다.</font>
음악을 기피하는 어른들이 세계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보편성을 가지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무덤덤하게 표현하는데, 감정을 밝게 꾸미는 노래가 많아서 무덤덤한 것이 슬프게 들리나 보다. 와다씨는 그런다. ‘나는 네가 애절하게 노래하는 게 좋다’고. (웃음)
능가하려 쓴
<font color="#216B9C"> 이상은의 노래는 도회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쿨하기보다는 핫하고 나아가 교훈적이다. 한편으론 시조 같다고 할까. 근본적인 단순함이 있다.</font>
알고 보면 촌스럽단 얘긴가. (웃음) 내 취향이 그렇다. 존 레넌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의 초기작 는 웅장하지만 일본 문화를 접한 이후의 은 심플하다. 나도 그런 하이쿠 같은 단순함을 좋아한다.
<font color="#216B9C"> 예전의 음반을 다시 들어보니, 예전의 이상은은 좀더 흐느끼고 지르고 그랬다. 물론 같이 동요를 부르듯 두 손을 모아서 저으며 불러야 할 것 같은 노래도 있었지만. 어쨌든 창법이 갈수록 담백하다.</font>
나이 드니까 그렇다. 20대에는 불안불안하고 예민했다. 근데 점점 둔해진다. 성격도 좋아지고. (웃음) 그게 목소리로 나오는 거지 싶다. 어른이 되는 게 너무 좋다.
<font color="#216B9C"> 언제부터 변했나?</font>
한국에 돌아와 고생을 하면서 철이 좀 든 것 같다. 일본에서 일할 때는 공주처럼 대해주고 하니까 정말로 철이 없었다.
<font color="#216B9C">이상은의 히트곡은 거칠게 나누면 두 가지다. 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쓸쓸한 건전가요 같이 남은 음악, 처럼 아시아 민속음악 혹은 월드뮤직으로 분류될 만한 음악. 누군가는 이번 음반의 이 같다는 얘기도 하더라.</font>
맞는 얘기다. 프로듀서가 이제까지를 돌아보고 모든 발자국을 소중히 여기면서 곡을 써봐라 했을 때, ‘을 능가하는 곡을 쓰고 싶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을 만들었다. 이제는 스스로 만들었던 노래는 하나의 가지로 받아들인다. 싱어송라이터가 자기 노래의 계보를 점점 발전시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옛 노래가 조금 부끄러워도 뛰어넘으면 되는 거다. 사실 11집의 은 를 뛰어넘어야지 하면서 만들었다.
<font color="#216B9C"> 얼마 전 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선정했다. 가 10위에 올라, 이상은은 1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여성 가수로 뽑혔다. 도 99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것들은 90년대 중·후반의 작품이다. 이후의 음악적 행보에 대해서.</font>
11, 12집에 대해서 평가를 하자면, 의 팬들이나 평론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에 단순한 대중은 아니지만 음악을 분석하지 않고 많이 듣는 젊은 친구들은 좋아했다. 그런 친구들은 공연을 즐긴다. 공연을 하면서 무척 행복했다. 와다씨는 그러더라. ‘너, 너무 놀았다. 이제는 식자들이 좋아하는 음반을 내자.’ (웃음)
“다음 음악적 로케이션은 파리였으면”
<font color="#216B9C"> 이상은은 이다. 이상은 하면 서울, 도쿄, 뉴욕, 런던이 떠오른다. 당신이 살았던 도시다. 여기에 오키나와가 추가됐다. 다음의 음악적 로케이션은 어디인가.</font>
다음엔 파리였으면. 아무래도 유럽인은 미국인보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특히 프랑스는 약자에 대한 시선이 발달한 나라 같다.
<font color="#216B9C"> 1989년에 데뷔했으니 어느새 2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당신과 함께 늙어가는 팬들이 있다.</font>
여성 팬이 7 대 3으로 많다. 어떤 주부가 집안일이 너무 힘든데 이번 음반을 듣고 힘을 얻었다는 평을 썼더라. 굳이 남녀를 구분할 마음은 없지만, 아무래도 내가 여성이어서 여성의 아픔을 의식하지 않아도 표현하게 되고, 그들에게 힘이 되는 부분이 있다. 남자들은 자신의 얘기를 대신 해주는 아티스트들이 많지만, 여성에겐 그들의 삶을 현실감 있게 대변하는 가수가 드물잖나. 그들에게 힘이 된다면 할 일을 했다고 느낀다.
<font color="#216B9C"> 묻지 않아서 하지 못한 말은.</font>
누가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치열하게 만들었는데 음악은 너무 편하다고. 치열하게 편안한 노래를 만들었다.
이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상은 같은 뮤지션은 불행히도 없다. 양희은, 한영애는 작사를 통해서 자신의 음반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였지만, 작곡으로 자신의 음반을 장악하진 못했다. 대중음악에서 뮤지션이 주류에서 밀려난 소수가 된 이후에 소수자의 소수자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리하여 이상은은 자연을 노래하고, 우주를 사유하고, 관계를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남아 있다. 역시나 드물게, 13장의 음반을 통해 그의 청춘은 우리의 노래로 남았다. 20대 초반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이라고 소리치고, 20대 후반에 “외롭고 웃긴 가게로 들어오세요”라고 절규했으며, 30대 중반에는 뒤늦게 만끽하는 연애의 즐거움을 솔직하게 노래에 담았던 그의 과거를 우리는 들었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언니는 이제는 멈춰서 물끄러미 자신의 과거를, 우리의 세상을 응시한다. 그리하여 13집에는 이상은의 한쪽도, 반쪽도 아닌 여러 쪽이 담겼다. 노를 저어가는 사람을 “네 등은 붉은 흙 같구나”라고 절창했던 의 가사는 이렇다. “물길은 하늘에 닿고. 해는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지고. 마음은 서로에 닿고. 어느새 강물이 웃고 있는 걸 보니 우리도 웃고 있겠구나.” 비로소 그가 웃고, 우리가 웃는다. 슬프고 환하다.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그래도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허무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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