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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랑, 끝은 죽음 같은 절망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허진호 감독의 가장 잔인한 멜로영화 </font>

▣ 남다은 영화평론가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 그때 헤어지죠, 뭐.” 허진호 감독의 에서 은희(임수정)는 말한다. 그.때. 헤.어.지.죠. 거짓말이다. 지금 사랑에 눈먼 자는 미래를 보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헤어짐이란 오직 죽음, 즉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끝, 혹은 사랑의 어떤 완결이다. 그.때. 헤.어.지.죠. 그건 다만 바람 한 줄기에도 쉽게 흩어져버릴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자, 그럼에도 그 사랑을 붙잡으려는 자가 자신의 불안한 영혼에 속삭이는 기만적인 말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칭얼대는 자나 “그럼, 그때 헤어지죠”라고 성숙하게 중얼거리는 자나 부서지는 사랑 앞에서는 결국 똑같이 무너진다는 것. 사랑은 무자비하다.

현재만 보는 여자, 미래를 찾는 남자

여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세속적인 도시생활을 영위하던 영수(황정민)는 사업도, 사랑도, 건강도 잃고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으로 요양원에 들어간다. 자신의 변화에 냉소적이고 거칠게 반응하는 그는 사실, 잃어버린 것의 흔적을 보는 남자다. 8년째 요양원에서 살고 있는 은희는 폐질환을 앓고 있지만, 밝고 낙천적이다. 주위를 보듬어안는 그녀는 자신이 상실한 것보다 자신에게 남겨진 것을 보는 여자다. 말하자면 남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뒤돌아보고 여자는 눈앞의 현실을 본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무척이나 다른 삶의 태도. 만약 이들이 세상 한가운데서 만났다면, 이들 사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러나 영수와 은희는 구석에서 새어나온 가녀린 희망 한 자락에도 모든 것을 거는 세상의 끝에서 만났다. 이들은 그렇게 사랑을 시작했고 살고 싶다는 욕망 앞에 ‘행복하게’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랑에 빠진 자는 마음속에서 자꾸만 싹을 피워가는 욕심을 거절할 수 없다.

영수와 은희는 요양원을 떠나 어느 시골 마을에 둘만의 집을 만든다. 함께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잠을 자며 진짜로 함께 ‘산다’. 최소한의 생활 패턴 속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발견한 연인. 영수의 몸은 날이 갈수록 회복돼간다. 그건 그가 세상의 끝에서 다시 조금씩 세상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의미이자, 두 남녀에게, 특히 은희에게 가여운 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견하는 징조다. 은희는 자신의 행복이 바로 이곳에 있음을 확신하지만, 영수는 자신의 행복이 아마도 저 밖에 있을 것이라고, 적어도 더 이상 이곳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 여자는 여전히 현재만 보지만, 남자는 과거에서 미래를 본다.

허진호는 여전히 한 공간 안의 두 남녀가 마치 한 몸처럼 밀착한 순간과 동일한 공간 안의 그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듯 멀어진 순간의 정서적 거리를 담아내려 애쓴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주인공들 주변에는 세심하지만 생색나지 않게 그들이 돌봐주거나 그들을 돌봐주는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은 가장 단순한 화법으로 진행되는 영화처럼 보인다. 사랑의 시작과 끝이, 행복과 비극이, 혹은 그 구구절절한 시간이 압축되어 분명하게 교차하고 인물들의 심리는 숨을 고른 뒤 표현되는 대신, 직설적인 대사로 내뱉어진다. 두 남녀의 간극은 각각의 캐릭터나 영화가 이들을 보는 시선 등에서 그 어느 때보다 벌어져 있다. 은 이들의 만남 이후 더디게 변화해가는 내면에 찬찬히 몰두하기보다는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주며 껑충껑충 건너뛴다. 영화 속에서 은희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수의 삶은 외적인 상황에 따라 매우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건 결국 은희가 아닌 영수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랑의 가면을 잃은 자의 맨얼굴

이상한 것은 영수가 은희를 떠난 뒤, 영화가 줄곧 떠난 영수만을 보여주며 남겨진 은희의 삶을 쉽게 놓아버린다는 점인데, 은희는 그 뒤 영수에게서 그가 결코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로 존재할 따름이다. 허진호는 남겨진 자를 영화 밖으로 밀어내고 떠난 자가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과정만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그 후’가 없다. 은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다. 허진호의 가장 잔인한 멜로라고 할 수 있을 에서 은희는 지금껏 그가 빚어낸 인물들 중에서 가장 투명하다. 처음에 그 투명함은 그녀를 사랑에 먼저 손을 내밀고, 그 사랑을 보살피고, 떠나는 사랑을 울며 붙잡는, 사랑을 구체화하는 인물로 그려내지만, 나중에 그 투명함은 그녀를 피와 살을 떼어낸 누군가의 사랑(=기억)으로 가둔다. 이 부분은 을 피상적으로 만드는 가장 큰 약점이지만, 이러한 과정은(혹은 은희는) 네 번째 멜로에 이르러 허진호에게 남은 사랑에 대한 환상처럼 보인다. 임수정이 연기를 잘했음에도, 영화에 밀착된 황정민에 비해 좀체 영화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도 은희라는 캐릭터에 기인할 것이다. 은희는 그녀의 선택과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캐릭터 자체가 이미 사랑의 뜨거운 육체성이 딱딱한 기억으로 마모되는 과정을 체현한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슬프게 만든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그 슬픔은 마음을 울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은 사랑이란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은희는 영수와의 우연하고도 어색한 첫 만남 직후에 슬쩍 손거울을 꺼내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이미 그때 그 거울 안에는 영수의 보이지 않는 시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그녀는 물끄러미 거울을 본다.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으려는 자의 달뜬 마음은 그 시선이 부재하는 순간, 외로움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환상의 막이 사라진 뒤 대면한 맨얼굴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은희를 떠난 영수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장면. 술에 취했어도, 더러운 침이 얼굴을 뿌옇게 흐려놓아도, 거울 속에서 그가 보는 것은 사랑의 가면을 잃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괴물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은’ 행복하지 않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다시 피우는 거야”

그렇다면, 의 대답은? 영화 초반 영수의 요양원 룸메이트였던 폐질환 환자는 오랫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태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40년을 피웠는데 그래서 후회 많이 했는데, 후회하지 않으려고 다시 피우는 거야.” 그리고 그는 곧 죽음을 선택한다. 그의 말 속에 미흡하게나마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사랑이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할 것을 알지만 후회하지 않기 위해 또다시 살고 사랑하는 것. 물론 그 끝에는 죽음 같은 절망이 언제나, 여전히 버티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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