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도대체,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 30년 넘게 톱을 유지한 김수현 드라마란</font>
▣ 이문혁 드라마 프로듀서
아직은 커피향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으니 시작은 일단 (커프)으로. 오랜만이었다. ‘때문에’ 만나고 ‘때문에’ 좋아하고, ‘때문에’ 헤어지는 드라마들 사이에서, ‘남자든 외계인이든 갈 때까지 가보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만난 것이 그래서 반가왔다. ‘그럼’을 보여주고 또한 ‘불구하고’를 설득하는 장인들의 솜씨와 집중력이 눈을 씻고 보게 했고, 고은찬이 있어 행복했다. 드라마 속의 세상을 사람들이 엿보고 웃고 우는 이유가 결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확인을 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럼’과 ‘불구하고’를 보여주고 설득시키는 데 검증된 최고의 장인은 바로 작가 김수현이다.
“튀겨 죽일 것들” 한마디로 설득
“중요한 건 15년을 가뒀다는 것이 아니라 15년 만에 왜 풀어줬는가예요”라는 영화 의 대사를 빌리면, 중요한 건 김수현이 30년이 넘는 동안 톱을 유지하고 있다는 대단함이 아니라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김수현의 드라마를 좋아해왔다는 놀라움이다. 실감을 돕기 위한 한마디. 도대체,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다. 더 기가 막힌 일은 대통령만 여섯 번이 바뀌는 동안에도, 김수현의 드라마는 변하지 않았다. ‘김수현표’라는 브랜드가 말해주듯 그녀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길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김수현은 소위 트렌드를 따라가기보다는 다른 것을 선택한다. 세상의 변하지 않는 것을 포착해 보여주는 일, 바로 ‘인생’이다. 그리고 김수현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설득시킬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태왕’의 ‘사신’보다 강력한 그만의 언어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영화보다는 라디오에 가까운 장르 같다’라는 어떤 연출가의 토로는, 김수현의 공인된 탁월한 언어감각이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수현은 인물의 성격을 오로지,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통해서, 그것도 놀랍게도 짧은 시간에 사람들에게 설득한다. 고은찬이 먹는 자장면 그릇이 하나둘 쌓여가는 컴퓨터그래픽(CG)이, 김수현에게는 별 필요가 없다. 그저 “튀겨 죽일 것들”이라는 은수, 하유미의 일갈이면 그녀의 성격은 물론, 친구에게 남편 뺐긴 동생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강도까지 설득 완료다.
드라마 에서 딸에게 바지도 못 입게 하는 파쇼 대발이 아버지 이순재 몰래 “지 아들은 나가서 자식을 열을 낳는지 스물을 낳는지 모르면서”라며 던지는 대발이 엄마 김혜자의 궁시렁 한마디 속에, 드라마 에서 냉면집을 해보겠다는 조카손녀에게 “왜 하필이면 냉면이냐, 먹다 보면 한쪽 끝은 뱃속에 가 있고 다른 쪽 끝은 그릇 속에 있는 노무걸”이라는, 할머니의 촌철살인 안에, 김수현의 드라마 속 인물들을 단순히 브라운관 안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살아 있는, 있을 법한 ‘사람들’로 변하게 하는 마법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삶이 보인다.
현대어·여성·자본 친화적으로 ‘인생’ 말해
의 프린스들이 어느 순간에 성큼 바로 옆의 프린스로 다가오면, 그들이 뭘 하든 그건 ‘사건’이 되듯, 김수현의 언어로 세례 받아 거듭난 인물들이 겪는 일들은 보는 이들에게 있을 법한 삶이 된다. 성격을 알면 행동 방식을 아는 법. 예측이 맞았을 때의 쾌감과 빗나갔을 때의 자극이, 모든 구경꾼들이 찾는 재미의 근본이라는 것을 영민한 김수현은 놓치지 않는다. 의 두 버전에 공히 나오는 장면 하나. 고시에 합격한 태준이 전에 없이 상기된 얼굴로 달려가 합격 소식을 전하자 “그럼 떨어질 줄 알았냐?”는 어머니의 무뚝뚝한 대답. 그 어머니의 성격과 자식에 대한 믿음을 알기에, 그 독한 칭찬 속에 있는 애틋한 사랑이 보인다. ‘그럼’을 알기에 ‘불구하고’가 설득되는 상황. “당신, 부셔버리겠어”라는 독한 저주가 통쾌했던 것은, 믿음을 저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식을 저버린 아버지에 대한 응징이기 때문이며, 본래 여린, 자식 잃은 엄마가 토해낸 한이기에 절절했다. 자신을 가장 믿어주는 친구의 남편을 도둑질해가는 천인공노할 일도, 김수현에게 말을 배운 인물들이 저지르면 동의는 할 수 없지만 이해는 되는 연금술을 통해, 언어는 ‘산다는 것’으로 바뀐다. 김수현 언어는 오로지 ‘현대어’이며, 성별은 ‘여성’이고, 세상을 보는 시각은 자본 친화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의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결국 ‘인생’이라는 점이,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역시 김수현’을 말하게 만드는 열쇠가 아닐까? 작가 김운경에게 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김수현에게 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지 싶다.
언어의 섬섬옥수에 눈을 뺏겨 가끔은 잊지만, 김수현은 그만의 언어를 통해 올곧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휘황함을 가리키고 있다. 새 천년이 온 지 한참인 지금에도 김수현의 와 같은 그녀의 다른 ‘언어 저작’들이, 그녀 스스로의 언어가 없이도 리메이크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현 원작의 가 또다시 9월15일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은찬’과 ‘한결’의 사랑이나 ‘태준’과 ‘미자’의 사랑이나, 그것이 ‘사랑’인 한 애틋하긴 마찬가지란 얘기다. 마지막으로, 요즘 브라운관이 사극의 홍수를 맞으면서 개인적인 바람 하나. 김수현의 , 그리고 김운경의 이 보고 싶다. 아, 그 반대가 더 흥미진진하려나? 하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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