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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주부가 완벽한 이웃이 된다면

등록 2007-09-14 00:00 수정 2020-05-03 04:25

과 닮은, 혹은 반대인 드라마

▣ 강명석 기획위원

“어떻게 이놈의 집구석엔 비밀이 없어.”

SBS 수목 드라마 의 윤희(배두나)는 수찬(김승우)에게 툴툴거린다. 자기 어머니(박원숙)는 남의 인생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안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윤희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 윤희는 재벌 2세이자 자신의 상사인 준석(박시후)이 결혼은 회사 사장인 고 사장(정동환)의 딸 혜미(민지혜)와 하고, 사랑은 자신과 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또 윤희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덕길(손현주)의 아들 고니(신동우)는 수찬의 아들인지도 모른다. 다른 집에는 좀더 심각한 비밀들이 있다. 혜미는 부모 몰래 옛 남자친구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유산했고, 의처증에 걸린 대한(박광수)은 아내 정숙(안선영)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위스테리아 자살사건 vs 행복마을 살인사건

어디서 많이 본 내용 같다고 생각한다면, 정확하다. 은 과 닮아 있다. 중산층 마을 위스테리아가 사람들의 미소 뒤에 온갖 비밀들이 숨겨져 있듯, 행복마을 사람들의 집에는 밝힐 수 없는 비밀들로 가득하다. 이 한 여성의 자살로 시작하듯, 은 수연(장혜숙)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은 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행복마을 사람들의 비밀을 다룬다. 에서 주부의 죽음은 시청자를 위스테리아가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그 주부가 자살한 이유가 밝혀지는 동안 위스테리아가 사람에게는 사실 지금 당장 자살해도 좋을 추문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반대로 행복마을 사람들의 비밀은 이미 상당 부분 밝혀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제비였던 수찬의 과거를 알고 있고, 수찬과 윤희는 혜미의 과거를 알고 있으며, 대한과 정숙의 관계 역시 처음부터 시청자에게 공개됐다. 의 진짜 비밀은 이런 비밀을 가진 ‘이웃’들이 어떤 ‘관계’로 얽히느냐는 것이다.

수연의 죽음은 그들에 관한 퍼즐조각을 맞추는 촉매제다. 형사 강역개(김뢰하)가 수연의 사건을 파고들수록, 우연히 모인 것 같은 그들의 관계가 밝혀진다. 수찬은 수연의 연인이었고, 덕길은 수연을 짝사랑했으며, 고니는 수연의 아들이다. 그리고 고 사장과 준석의 어머니, 그리고 특별한 능력 없이도 승진한 희섭(이원재) 사이에는 수연의 죽음을 둘러싼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미드’(미국 드라마)인 이 한 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건을 다룬다면, 한국 드라마인 은 개연성 없이 모인 것 같았던 모든 사람들을 서서히 하나의 관계로 묶고, 그 관계가 비밀의 가치를 결정한다. 혜미의 비밀은 윤희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윤희가 준석과 사랑에 빠지면서 가치가 달라지고, 덕길이 고니의 친부가 아니며, 심지어 숫총각이라는 비밀은 그가 미희(김성령)와 사랑에 빠지면서 새로운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은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복잡한 미스터리 대신 ‘오지랖’ 인간관계

은 모든 캐릭터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흩뿌려놓은 뒤, 그것을 인간관계의 발견, 혹은 발전을 통해 하나로 모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마치 3차원 구조물처럼 새롭게 축조한다. 대한의 의처증은 그 자체로는 작은 에피소드지만 대한이 수찬과 정숙이 사실은 대학 동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대한이 회사에서 수찬을 모략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이 다시 수찬의 친구인 윤희와 그의 연인인 준석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은 복잡한 미스터리 대신 한국인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통해 위스테리아가의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방향의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 과연 저 이웃과 저 이웃은 어떻게 연결될까. 그들은 어떤 계기로 친해지거나 싸울까. 특히 은 그 모든 비밀과 복잡한 인간관계를 한국 멜로드라마의 코드로 해결하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의 비밀이 그러하듯, 윤희와 준석의 사랑은 그 자체로는 그저 연애담일 뿐이다. 그러나 윤희와 준석이 사귀게 되면서 혜미의 비밀은 폭로될 위기에 처하고, 반대로 수연의 죽음을 둘러싼 고 사장과 준석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어떤 비밀이 폭로되면 윤희와 준석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서 준석과 윤희, 혹은 덕길과 미희의 애정관계가 시청자에게 모두 호응을 얻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재벌 2세-털털한 여자, 촌스러운 남자-능력 있는 여자의 도식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가 다른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많은 우연과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면서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윤희와 준석의 관계는 초반에는 윤희와 수찬의 관계와 섞이면서 앞날을 예상하기 어려웠고, 덕길은 윤희에게 은근한 관심을 두거나 수찬과 고니 문제를 해결하다가 중반에 이르러서야 미희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거기에 부터 캐릭터가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의 디테일을 기막히게 잡아내는 정지우 작가의 극본은 사랑이 곧 인간관계의 변화와 발전이 되는 의 멜로에 더욱 어울린다. 보통의 한국 멜로드라마들이 주연과 조연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나누고, 그들의 모든 관계를 처음부터 확정지어놓는 것과 반대로, 은 마치 진짜로 행복마을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들에게 예측할 수 없는 관계를 주고, 그들의 화학작용을 통해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작품 후반까지 풍부한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미드 전성시대’에 한국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의 장점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모범 답안이다.

‘미드 같은’ 아니죠, ‘새 한드’ 맞습니다

은 미국 장르 드라마의 특성을 가져오되 그들의 토양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구성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장르적 특성을 가져와 거기에 한국인들이 여전히 좋아하는 4각관계 멜로드라마와 재벌가의 이야기, 그리고 한국 특유의 ‘오지랖 넓은 인간관계’를 절묘히 조합했다. 한국에서 과 〈CSI〉를 보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고,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에서도 메디컬 드라마나 수사 드라마를 원하는 시대.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은 ‘미드 같은’ 드라마가 아니라 미국 드라마의 장점 위에 한국 드라마만의 무엇을 개발한 한국만의 새로운 문법을 갖춘 어떤 드라마를 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은 어쩌면 우리에게 (완벽하지는 않아도) 새로운 한국 드라마를 만나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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