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상·이용우·김홍남·김홍희 씨 등에 드리운 의혹의 그림자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날개 없는 신데렐라의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추락한 뒤끝에 남은 흔적은 단박에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7월 초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뽑혔다가 가짜 박사임이 들통나 쫓겨난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감독 지명을 둘러싼 책임 의혹 공방이 그렇다. 6월부터 동국대와 불교계 언론에서 쟁점화한 학위 의혹을 비켜간 채 비엔날레 재단 이사장에게 신씨를 감독감으로 추천한 미술계 인사는 누구였을까? 지난달 초 신씨 파문 직후부터 비엔날레 쪽에 불거졌던 의혹의 고갱이는 이 부분이었다.
한갑수 이사장의 ‘고독한 결정’은 아닐 터
의혹의 씨앗은 애초 5월 구성된 감독 선임위원회의 파행 운영에서 뿌려졌다. 선임위원들이 세 차례 심사과정에서 유력 후보들의 고사와 이사회 제동으로 감독 선출에 실패하자 후보 9명을 집단 추천하고 선임 권한을 당시 한갑수 이사장에 넘겼기 때문이다. 미술판을 거의 모르는 한 전 이사장이 고독(?)하게 후보들 가운데 가장 어리고 경력이 얕은 신씨를 파격적으로 낙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술판 혹은 미술 정치의 생리를 아는 이사진 혹은 선임위원 중 누군가가 신씨를 사적인 경로로 강력하게 추천했을 것이라는 게 상식적 추론이다. 하지만 한 전 이사장은 추천 인사를 밝힐 수 없다고 입을 닫았다. 지난 7월18일 그와 이사진 27명은 전격 사퇴했다. 재단이 업무방해 혐의로 신씨를 고소하면서 검찰 수사도 시작됐다. 이 와중에, 신씨와의 인연 때문에 감독 추천의 배후로 거론된 몇몇 미술판 실력자들을 두고 추천 여부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용의선상의 인물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미스터리 추리극의 구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주역 격인 당시 선정위원 4명의 속내를 이 들어보았다.
1.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비엔날레 전 이사 및 예술감독 선정소위원장)
“재단 쪽은 피해자입니다. 신정아를 치켜세우며 부각시킨 언론, 신씨와 유착한 언론 의혹부터 수사해야 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화단의 실력자, 비엔날레 이사 겸 선정위원장으로 감독 선정 과정을 주도했던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는 처음 에 소신을 털어놓았다. 그는 자질이 부족한 기자들이 사태의 본말을 왜곡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선임위원장으로서 9명을 책임지고 추천한 것밖에 없고, 이후 역할은 끝났어요. 이사장이 누굴 만났는지도 모르고요. 개인적으로 감독감으로 광주 정서를 지닌 다른 인사를 줄곧 생각했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 교수는 언론 등에서 신씨를 추천했다는 의혹이 가장 집중된 인사다. 9명을 추천한 선정위원들 가운데 그를 뺀 8명은 신씨 외의 다른 인사를 추천했다고 밝혔지만, 이 교수는 추천 여부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박광태 광주시장(재단 명예 이사장)도 최근 간담회에서 “서울대 라인의 천거로 신씨를 선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신씨는 3년 전 이 교수가 기금을 출연한 대상 전시기획 부문에서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들’이란 외국 기획전을 자기 기획전처럼 포장해 대상을 받으면서 논란을 낳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후보자 공동추천 때까지 신씨의 나이도 몰랐을 정도”라고 했다.
아울러 지난 7월4일 신씨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는 보도는 100% 오보라고 단언했다. “신씨는 절차상 1명으로 압축된 예술감독 후보였다. 검증 단계를 거치기도 전이었다. 선정위원들은 검증 권한도 없는데, 검증을 안 했다는 비판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절차상 하자가 없고, 세 차례 선정 심사 과정에서 9명의 후보를 이사장 앞에 집단 추천한 것도 의사 진행의 효율성을 감안하면 잘된 결정이다. 왜 이사진이 사퇴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한 기획자는 “지난 7월4일 선임 사실 발표는 명백한 감독 확정 사실을 기자들에게 공지한 것인데, 미검증 단계였다는 건 궤변”이라고 일축했다. 감독 후보였던 다른 미술인도 “감독 선임은 검증 과정을 전제한 것으로 그의 주장은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고 했다. 2002년 재단이사가 된 그는 지난 5월까지 세 번 연속 연임됐으나, 지난 8월3일 발표한 새 선출직 이사 명단에서 빠졌다.
2. 이용우 5회 비엔날레 전시감독(재단이사, 선정위원)
“내가 추천을 했다고요? 그 사람들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요. 신정아란 이름만 들었지 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했다. 물론 신씨의 경우 가능성이 막판에는 있었어요. 고사한 이들이 줄줄이 나오고 비엔날레 룰에 어긋나는 경우를 빼다 보니 그런 거죠. 학위 위조 사실을 알고 쇼크 먹었어요.”
5회 비엔날레 감독이자 현 비엔날레 재단의 실세로 꼽혔던 이용우씨는 단호하게 추천설을 부인했다. 애초 이씨가 의혹을 받았던 것은 5회 비엔날레 때 자신의 전시감독 선임을 주도했던 이종상 교수와 함께 재단 운영의 실세로서 거명됐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이 점을 들어 그가 신씨 인선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3일 발표된 새 선출직 이사진에서 유임됐다.
3.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전 재단이사)
평소 정치적 성향이란 평가를 받는 김홍남 관장은 예일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런 까닭으로 동문임을 앞세워 그에게 접근해온 신씨가 각별한 인연을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씨가 예일대 박사학위 과정을 통과했다는 가짜 팩스 문건을 동국대에서 공개할 당시, 그는 신씨의 동문 선배란 점 때문에 문화관광부와 광주비엔날레 쪽에서 부탁을 받아 예일대에 진위 여부를 앞서 확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엔날레 예술감독 인선 과정에서도 올해 5월 신임이사가 된 그가 신씨를 적극 천거했을 것이란 의혹이 나왔으나 김 관장은 펄쩍 뛰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만난 건 딱 1번밖에 없고 연배도 20년 이상 차이 나는 친구와 왜 어울리느냐”고 항변했다. 그는 “왜 빨리 추천 인사를 공개하지 않느냐”고 한갑수 전 재단이사장 쪽에 따졌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추천 연루 의혹으로 고통을 받는다. 추천자를 빨리 밝히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 신씨의 용의주도한 작전이지 거대한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관장은 이종상 교수와 더불어 새 선출직 이사진에서 빠졌다.
4. 김홍희 6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감독(선정위원)
김홍희씨는 선후배 전시기획자로 신씨와 만났던 인연과 올 2월 아르코 아트페어 준비 과정에서 함께 일했던 경력 때문에 추천설이 제기됐다. 그는 다른 미술계 인사를 1차 추천 때 지명했으며 대다수 위원들이 신씨를 별로 관심에 두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신씨가 감독 후보가 됐다는 것은 9명의 후보를 추천한 이후 누군가 이사장에게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짐작은 가지만…. 사실 추천한 사람도 피해자라고 봐요. 학력 위조 사실을 알았으면 강하게 추천했겠어요. 이런 식으로 선정위원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의혹을 받게 만들 바에는 차라리 추천 인사를 공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검찰은 조사중… 대권 주자 이름까지 나와
한편 검찰은 7월20일부터 재단 관계자와 일부 감독 후보들을 불러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선정위원 대부분은 조사를 기피하거나 조사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사장의 감독 선임 결정이 서류 등 근거자료 없이 미술계 인사의 비공식적인 추천을 거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큰 만큼 추천자를 가리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학계와 미술계에선 감독 선임에 입김을 넣었다는 대선 주자 이름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실체가 흐릿해져가는 신정아 예술감독 선임 파동은 미술동네의 ‘불량 전설’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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