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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드’(한국드라마) 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등록 2007-07-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소재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탄탄한 주제와 살아 숨쉬는 인물이 바탕이 돼야

▣ 이문혁 드라마 프로듀서

‘그저 있는 이야기를 쓸 뿐 만들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하물며 공자님도 말씀하셨지만, 그로부터도 대략 수천 년이 지난 지금, 하늘 아래 처음 들어본 얘깃거리를 찾기란, 불가사리도 튀겨먹는다는 중국인들에게 한 번도 안 먹어본 음식을 대령하라는 것만큼 별 따기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살짝씩’ 바꿔가며 잘 넘어갔다. 근데, 갑자기 ‘미드’(미국 드라마) 바람이 불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사랑의 변주곡, 불륜의 3종세트를 양념으로 얼추 버무려 내놓는다는 혐의가 짙었던 한국식 ‘드라마 백반’을 가지고 맞서기에는, 그들이 내놓는 메뉴는 매우 다양했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온도 또한 뜨거웠다. 급속도로 허물어지는 국경 및 언어, 시간의 장벽은 이제 경쟁 상대는 동 시간대의 타 방송사만이 아니라는 위기감을 낳았다. 변화는 대세보다 필수다. 태평양을 넘어 불어온 바람은 전에 없이 다양한 직업의 종사자들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스카우트하는 계기가 됐다. 하물며, 사채업자까지.

의 병원이 신선해 보인 이유

문화방송 은 병원이 사람을 고치는 곳임과 동시에 의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직장’이라는, 그리고 병든 이들을 살리는 의사들 또한 욕망과 운명 앞에 한없이 약한 ‘개인’일 뿐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했다. 익숙한 재료를 다른 방법으로 요리해 먹었을 때 느끼는 신선함이랄까. 스트레스로 생긴 병을 고치러 가는 곳에 더 큰 스트레스와 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은 색다른 발견이었고, 그간 드라마 속에서 ‘열쇠 세 개’라는 이미지 속에 갖혀 있던 ‘의사 선생님’들을 해방시켰다. 더불어, 오래전 신구 선생님의 아침 드라마 이후 가장 다양한 환자들을 보여준 는 병원이라는 공간은 병이 있고 환자가 있는 한 얘깃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소재의 보고임을 확인시켰다.

와 의 차이

세상에 질병만큼 다양한 것이 하나 있다면 범죄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범죄의 다양한 유형들은 새로운 소재를 찾는 이들에겐 또 다른 ‘물 반, 고기 반’인 셈. 경찰드라마 가 이룬 수치적인 성과를 뛰어넘는 기대 어린 평가, 즉 시즌 드라마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논의의 이면에는, 물론 개성 있는 캐릭터를 창출한 ‘형사님’들의 공을 무시할 순 없지만, 카인이 아벨을 죽이면서부터 인류와 함께한 범죄라는 소재는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고갈될 염려는 없을 거라는 조금은 서글픈 믿음도 한몫했다. 하지만 요리사의 기본은 재료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 참신한 소재가 곧 좋은 드라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몬도가네’의 식성만으로 ‘미식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색다른 소재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결국 공감을 통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진실성이다. “공항은 국경이에요”라는 멋진 대사도, 이정재와 최지우라는 강력한 원투 펀치도, 거대한 공항에서 길을 잃은 를 끌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남선녀의 연애 공간으로서 공항은 있었지만, 그 속에서 고민하는 인물, 또한 그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드라마는 넓은 ‘에어시티’ 어딘가로 실종됐다. 고학하는 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형과 그 형을 구하기 위한 동생의 희생과 노력. 흡사 60년대의 영화 선전 문구 같은 내용이, 에서 감옥이 아닌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보이게 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다. 몸에 빼곡히 그려진 탈옥의 청사진은, 형에 대한 믿음과 가족 사랑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감옥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질식하지 않고, 바다 건너에서까지 ‘석호필’이라는 이름을 얻는 공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박신양이라는 배우가 온몸을 던져 돌파해내지 못했다면, ‘사채업’이라는 낯설고 말 많은 소재가 무리 없이 드라마 속에 녹아들 수 있었을까? 또한 일흔이 넘는 노구로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고 천진하게 행진했던 ‘야동순재’ 없이, 며느리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고 실업자인 아들은 식신인 의 전복된 가족 구조에 시청자가 반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명도 있는 스타를 쓰면 시청률이 담보된다는 최근에 검증된 오류만큼이나, 단순히 처음이면 이른바 ‘먹힌다’는 ‘소재주의’의 함정도 활주로 근처를 날아다니는 도요새만큼이나 위험해 보인다.

한 편에 20억원이 넘는 제작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전제작 시스템 등을 지닌 ‘미드’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국내의 제작 시스템을 감안하면, 그들과 우리의 성취도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농담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의 경쟁력은 넉넉한 인프라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통해 표현하려는 탄탄한 주제와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물이 바탕이라는 점만은 우리도 단순히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힘든 지점이다. 좋은 콘텐츠도, 참신한 소재도 최소한 드라마에서는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을 위한 빈 자리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2005년에 방영된 문화방송 베스트극장 이 신선했던 것은 스포츠뉴스에서 보던 그곳을 드라마에서 봐서가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때문이었다. 이것이 문화방송 이 들어갈 자리를 비워놓고 한 회 한 회 기대하며 보아나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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