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서울역의 새 옷, 어울리나요

등록 2007-07-13 00:00 수정 2020-05-03 04:25

정부와 문화계의 고민거리였던 서울역사, 결국 ‘복합문화 공간’으로 리모델링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7월6일 저녁 우리 근대사 80여 년의 곡절이 서린 옛 서울역 역사 내부는 패션쇼 무대로 변했다. 근대풍의 복고 패션으로 잘 알려진 디자이너 홍승완씨가 옛 역사의 고풍스런 아치형 중앙홀 공간과 바로크식 기둥 사이에 연단을 올리고 그의 브랜드 ‘스위트리벤지’의 여름, 겨울옷 컬렉션전을 펼쳤다. 연기자 최정원씨를 비롯한 날씬한 모델들이 장엄한 주황빛 벽돌 건물들을 배경으로 근대풍의 모던 복식과 첨단 미래형 복식이 뒤섞인 옷을 입고 가뿐한 걸음걸이를 과시했다. 현란한 음악이 울려퍼졌고, 문화계 인사, 시민들 사이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졌다. 의상 60여 벌이 소개된 패션쇼에 뒤이어 뒤풀이 파티까지, 서울역 광장은 모처럼 들뜬 분위기에 달아올랐다.

“의자 하나도 최고의 명품들로 채울 것”

옛 역사의 아치형 중앙홀과 바로크풍의 기둥들은 장중한 형식미로 모델들의 퓨전 패션과 이미지를 맞췄다. 1925년 동양 굴지의 역사를 내세운 현재의 옛 역사 건물이 세워진 이래 2004년 1월 고속철이 서는 옆쪽 새 역사에 기능을 넘겨줄 때까지 79년간 한반도 철도의 중추였던 역사 건물은 패션쇼 무대를 통해 다른 공간으로의 변신을 알렸다. 문화관광부가 올해를 기점으로 옛 서울역사를 나라를 대표하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바꾸기로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2010년까지 인천공항과 공항철도로 서울역이 직통이 되면 서울역사가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관문이자 발신지가 될 것이며, 통일시대 유라시아 철도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예측에 따른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이와 관련해 지난 연말부터 건축계를 비롯한 각계의 공청회와 심포지엄을 거쳐 역사의 문화적 전용 방안을 고민해왔다. 복합문화 공간 계획은 3월 열린 근대문화재 활용 워크숍, 4월 열린 근대문화재 문화공간 활용방안 심포지엄, 6월의 옛 서울역사 디자인 공모전 등을 통해 확정한 것이다. 이 입수한 문화관광부의 리모델링 계획을 보면, 옛 서울역사는 첨단 정보기술(IT)로 이뤄진 미디어아트 동영상이 상영되며, 번쩍거리는 첨단 패션 트렌드와 디자인 상품들, 그리고 명품 공연 등 고급 이벤트들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180도 변신한다. 한민호 공간문화팀장은 “동시대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산물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의자 하나도 최고의 디자인 명품들로 채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내부 구조별로 공간 활용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는 리모델링 계획의 뼈대는 1층은 공연 공간 중심, 2층은 전시·회의 공간 중심으로 간다는 것이다. 옛 서울역사의 재활용은 수년 전부터 적지 않은 정부와 문화계 쪽의 고민거리였다. 소유자인 철도공사(코레일)는 원래 이곳을 철도박물관으로 쓸 예정이었으나 지난해 공사로 바뀌면서 사적이자 국가 소유인 옛 역사를 나라에 반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반환 이후 미술관으로 쓰는 방안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화재청 쪽은 서울역을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처럼 미술관으로 쓰겠다는 의견을 언론에 흘렸으나, 미술동네 쪽의 냉소를 낳았다. 옛 역사를 전용한 다른 유럽의 미술관들은 모두 현재 철로가 걷히고 역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서울역은 지금도 엄청난 수의 열차가 발착하는 중앙역 성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소음과 진동이 생겨 그림과 유물 보존에는 최악의 환경이 예상될 것이 명확한데도, 관심 끌기 차원에서 미술관 이전론을 거론했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지난 4월 근대문화재 공간활용 방안 전문가 심포지엄에서도 △다원적 복합문화 예술공간 △근현대 도시역사관 △근대미술관 안을 놓고 논의한 끝에 복합문화 공간으로 쓰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자 문화부는 복합문화 공간 전용 쪽으로 확고하게 리모델링 방향을 다잡은 상황이다.

이런 복합문화 공간 리모델링 계획이 옛 서울역사 재활용에 얽힌 모든 논란을 해결할 수 있을까.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옛 서울역사는 근대사와 해방 뒤 1970~80년대 격동의 정치·사회사를 함축한 역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경성 택시 노동자들의 첫 파업이 일어났고, 숱한 모던보이·모던걸들, 지식인들의 안식처였으며 일제시대 징용 학도병들이 끌려간 집결지 또한 서울역 광장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군수물자 거점이었고, 4·19혁명, 80년 서울의 봄, 6월항쟁의 주된 전장이자, 먹고살기 위해 상경한 농촌 총각, 처녀들이 처음 발길을 디딘 장소 또한 이곳이었다. 현재 문화관광부가 마련한 리모델링 계획은 건축물의 원래 구조에 대한 연구와 복원은 포함돼 있으나 건물에 아로새겨진 역사성에 대한 검토는 별로 되어 있지 않다.

일제시대 조선호텔과 더불어 장안의 최고급 양식당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서울역 2층 그릴의 모던한 분위기, 천재 이상이 소설 에서 핍진하게 묘사했던 티룸(끽다점), 떠밀려가는 부초들의 인생이 묻어 있는 이등·삼등 대합실, 근대 문명의 황홀한 광채를 상징했던 중앙홀 천정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살 가득한 장관, 경성 장안으로 가는 인력거 정거장이던 현 육교 앞 통문, 거리의 정치를 낳았던 현장인 광장의 역사 등을 다시 느껴볼 수 있는 묘안은 없을까. 현재 문화부 계획대로라면 이런 역사성과 관련된 아이템은 조선 총독과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용했던 귀빈실과 역장실 복원 등에 한정된 것으로 비친다.

또 서울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인 광장(2100여 평)의 문화적 복원도 과제다. 현재 주차장이 되어 문화적 모임터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광장도 소유자인 철도공사와의 협의로 대폭 리모델링해 옛적의 문화적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대전제는 세워놓았으나, 복원의 세부 방향이나 추진 일정 등은 아직 본격적인 협의에 착수하지 않은 상황이다. 아울러 시설 운영을 정동극장처럼 별도 문화재단에서 맡을 것인지, 민간 기관에 위탁할 것인지도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강박적 과시보다 시대성 살려야

이런 맥락에서 일부 문화계 인사들은 동시대 문화의 강박적인 과시보다 옛 서울역사의 시대성을 차분히 살펴볼 수 있는 옛 현장의 복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건축평론가인 이주연 전 편집주간은 “옛 서울역사는 지금도 철도역의 기능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실적 맥락에서 인근 신역사, 쇼핑단지와도 유기적으로 동선을 이어 공간의 또 다른 중심축 구실을 회복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첨단 복합문화 지대를 지향하는 옛 서울역사의 청사진이 나왔지만, 문화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모종의 답답함과 울적함을 풀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