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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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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시대를 가볍게 넘어라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경성 모던보이의 가볍고 매혹적인 사랑, 드라마

▣ 이다혜 자유기고가

“조국, 민족, 해방. 계급, 혁명, 자유. 독립, 투쟁, 테러. 그딴 거, 개나 줘버려.” 한국방송 수목 드라마 의 첫 장면, 선우완(강지환)은 그렇게 선언하고는 클럽에서 스윙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일제시대 경성, 선우완은 여자에나 관심 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친일파 부잣집 젊은 아들”이다. 그는 조국 해방보다 자기 자신의 해방이 먼저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한편 나여경(한지민)은 이화학당에서 신교육을 받았지만 전근대적인 여자다. 그녀는 친일파와 모던걸, 모던보이를 경멸하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은 그 두 남녀가 부딪치면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서양풍, 일본풍, 조선풍이 혼재된 채 들끓던 1930년대 경성은 사회적 분위기로 보나 ‘이미지’로 보나 시대적으로 보나, 이들의 로맨스에 색다른 맛을 불어넣는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항일이나 반일과 같은 딱지 없이는 다루기 힘들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로맨스를 발랄하게 그리고 있다. 극의 한편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이쪽마저도 무게가 가볍다.

은 로맨스 소설인 를 각색한 드라마다. 재밌는 점은, 시대 묘사에서나 남녀 주인공들의 관계에서나 드라마가 원작소설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이다. 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데 반해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즐기려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극 중심에 있다. 에서 로 바뀐 제목의 간극만큼, 원작과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의 정서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코미디언 출신의 배우들이 조연으로 기용됐다는 사실은, 각색 과정에서 가벼움과 웃음, 경쾌함에 비중을 두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발함’과 ‘발랄함’넘어 무리하기도

은 실존했던 시대나 인물을 다루는 데 엄격한 고증을 통해 역사적 무게와 공기를 충실히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더없이 자유롭다. 이런 때에 일제시대 경성이라는 곳은 외국 어느 곳보다 ‘이국적인’ 무대로 작용한다. 조선시대 이전처럼 생활상이 ‘지금, 여기’와 괴리되어 있지 않고, 외국처럼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주를 이루어 이질감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면에서 다르다. 차송주(한고은)가 기생이라는 사실은 이야기만큼이나 ‘그림’에 도움이 되는 설정이다. 기생의 한복이나 게이샤의 화려한 기모노, 양식 의복까지 폭넓게 소화하기 때문이다. 독립투사, 조국의 독립이라는 말이 수시로 등장인물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거의 그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다. 퓨전 사극을 표방하는 최근의 사극 드라마들이 요즘의 생활상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이야기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면서 때로는 ‘기발함’ ‘발랄함’을 넘어 무리를 한다는 느낌도 주는데, 역시 초반 흐름이 아슬아슬해 보이는 데가 있다. 재미로만 따지면 취향에 따라 크게 흠잡을 데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1930년대의 경성은 시대의 풍경이라는 면에서 훨씬 많은 함의가 들끓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아찔하게 달라지는 시대의 풍경, 모두가 낯선 공기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지던 그 당시의 경성의 매력이 단순하게 도식화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 시대에도 ‘모던남녀’는 단골주제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에서 중요한 키워드인 동시에 최근 영화와 드라마화가 활발해지는 1920~30년대 경성을 구분짓는 특색이기도 하다. 의 모던보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무모함과 시대에 아랑곳 않는 자유분방함으로 희화화된다. 극중에서 과하게 “요즘 것들”의 분위기가 풍기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 당시 경성에서도 그들의 존재는 걸핏하면 신문의 만화와 기사의 떡밥이 되었다. 현실문화연구에서 펴낸 (2003)에 인용된 “달러진 미남미녀씨”라는 당시의 신문기사는 모던걸을 이렇게 풍자했다. “결혼도 휫닥 잘하고, 이혼도 휫닥 잘하고 시집가기 전에 아이도 휫닥 잘 낳고, 자살도 휫닥 잘하고 하는 요새 젊은 여자들의 행동은 모두가 유선형식이다.” 비록 대부분의 모던걸들은 학력에 걸맞은 직업을 찾지 못해 이미 정혼자나 아내가 있는 모던보이들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지만, 많은 모던보이들은 조선 ‘최초의’ 직업들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 지점에서 많은 영화들이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다. 는 조선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 PD 이야기를 다루고, (가제)은 경성의 전화교환수 ‘다리퐁(텔레폰의 일본식 발음) 걸’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될 예정이다. 은 1940년대 경성의 현대식 병원을 배경으로 한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어, 8월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는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시대의 풍경을 이미지와 음악으로

1920년대 말 30년대 초 경성이라는 도시의 일상은 짧은 희망과 긴 절망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약병에 꽂힌 한 떨기 꽃처럼, 환상의 꽃에는 뿌리가 없었다. 서구문화에 대한 강제된 욕망과 동떨어진 식민지 조선의 생활현실이 갖는 이중성은, 지금, 여기에서 그 풍경을 되살려내려는 붐을 일으켰다. 은 그런 시대의 너비와 깊이를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시대의 매혹을 이미지와 음악으로 되살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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