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윙…윙…윙… 섬세한 기계가 마음을 만지다

등록 2007-06-08 00:00 수정 2020-05-03 04:25

기계예술로 감성을 말하는 독일 설치작가 레베카 호른의 첫 한국 개인전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로봇처럼 움직이는 작은 기계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진짜 나비, 새처럼 사뿐히 날갯짓을 펼친다. 망치로 반구를 땅 때리고, 함지 속의 물을 가만히 휘저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곤충의 더듬이처럼 큰 발 같은 것들을 놀려 그림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들도 보인다. 정교하게 고안된 기어, 모터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장치들. 그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이 관객의 마음을 가만히 잡아 흔든다. 과연 기계의 율동이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은 인간의 가녀린 정서까지 재현할 수 있는가.

눈과 귀가 예민해지는 전시장

독일의 여성 설치작가 레베카 호른(63)은 이런 어려운 전제와 의문들을 기계예술을 통해 수긍할 수 있게 실현한다. 그의 전시장에 가면 관객은 누구나 귀나 눈이 예민해진다.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가 독일 국제교류처(IFA)와 공동으로 차린 호른의 첫 한국 개인전(8월19일까지)은 예민한 직관 감성을 기계의 우아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여성작가의 감성 공간을 만들었다. 첫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 호른 특유의 기계적인 설치작업과 사진, 그리고 초기 퍼포먼스를 담은 다큐 영상과 작가의 대표적 장편 영화 3편이 나왔다.

장르상으로 본다면 전시장에 나온 호른의 설치작업은 대부분 움직이는 미술, 곧 키네틱 아트(kinetic art)에 속한다. 키네틱 아트 하면 흔히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의 비인간적인 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호른의 작업은 그런 예상과 달리 미세한 인간 정서와 자연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들머리에 있는 새 깃털을 날개뼈 모양의 기계장치에 붙인 , 섬세한 감성으로 여성의 마음 같은 물의 수면 위에 물뱀 모양의 조형물이 수시로 파장을 일으키는 설치작품 등이 예술과 자연, 인공과 자연의 관계를 새로운 각도로 떠올려보게끔 한다.

이들 인공 키네틱 조각이 재현하는 것은 인간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일종의 무언극과도 같다. 전시장 말미에 벽에 추상 액션 페인팅을 하듯 먹물을 죽죽 뿌려대는 분사기를 매달거나(), 두 발을 든 사마귀나 곤충의 촉수처럼 화폭의 위와 아래를 더듬고 있는 기계장치를 설치한 의 장면은 기계의 몸짓이 곧 인간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고도의 비유나 상징으로 읽히게 된다. 우리의 몸과 공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대화들을 이 정교한 기계장치들은 독특한 초현실적 이미지로 확성해 들려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 전시의 또다른 핵심은 설치, 조각, 영화 등 여러 다양한 형식을 자유롭게 실험하는 퍼포먼스 동영상과 장편 영화들이다. 1970년대 초반, 알몸으로 머리 위에 흰뿔을 매달고 밀밭 속을 걸어가다 길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신화적 퍼포먼스 (유니콘), 땅까지 닿는 길쭉한 막대를 장갑 끝에 달아 손가락 끝을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연장시킨 등 9개 퍼포먼스를 담은 그의 초기 다큐멘터리 동영상은 외부 공간에 대한 우리 감각의 변이와 확장에 대한 실험이다. 1975년작인 에서도 두 손으로 양쪽 벽 건드리기, 알몸 남성의 가슴 털 위로 지나가는 두 작은 물고기들의 춤 기억, 움직이는 몸에 붙인 거울 속에 비친 방 등으로 대변되는 퍼포먼스 영상들의 각종 행위 예술들은 전위적이면서도 신비적인 기운으로 가득하다.

알몸으로 머리에 흰 뿔을 달고…

작가가 무언극 같은 키네틱 아트나 외부 공간에 대한 예민한 탐색의 퍼포먼스를 시도한 까닭은 적이 흥미롭다. 함부르크 미술학교에서 석면 등으로 무리한 조각작업을 하다 분진으로 폐질환을 앓았고, 이후 요양했던 핍진한 추억이 자리하고 있다고 작가는 털어놓는다. 여기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지닌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 대한 추억이 덧붙었다. 여성작가라면 누구나 민감한 신체성에 이런 유폐와 역사적 상처가 달라붙으면서 깃털, 거울, 붕대 등의 매개체를 이용한 작가적 탐색의 노정을 걷게 된 것이다. 근현대 서양문학의 거장인 카프카, 베케트 같은 초현실적 세계에 경도됐던 작가는 격리와 탐색이란 코드를 통해 낯선 개인이 외부와 벌이는 접점 찾기를 추구했다. 그 결과 그만의 복잡하고 섬세한 키네틱 예술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발레리나, 맹인 신사 등이 등장하는 등의 초현실적 장편 영화나 공중에 매달려 건반을 쏟아내는 피아노 설치 장면 등을 담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시 설치작업 다큐 동영상 등은 흥미로운 작가 내면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트라우마 극복하는 독일 작가의 단면

독일 현대미술가들은 30·40년대 극악한 독일 나치스 정권의 사실주의 미술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유난히 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은유와 상징이 강렬하고 거친 화면을 통해 특유의 표현적 미술언어를 발전시켜왔는데, 이 전시는 그런 트라우마(내상)를 후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 역정의 한순간들을, 민감한 여성적 시선과 융합하면서 고도의 지성적 상징과 수사적 언어를 통해 변주하는 이들 작업은 여전히 때깔과 모양새만 찾는 국내 설치작업에 성찰거리가 된다. 현재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작가의 개인사를 화두로 펼쳐진 90대 노장 루이스 부르주아의 회고전 조형물들과도 맥락이 닿는 전시다. www.rodingallery.org, 02-2259-7781.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