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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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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의 ‘칸 이후’를 기대하며

등록 2007-06-08 00:00 수정 2020-05-03 04:24

부터 까지 배역에 물처럼 스며든 배우를 바라보다

▣ 심영섭 영화평론가

지금부터 2년 전, 백상예술대상 심사를 할 때의 일이었다. 그해 여우주연상 후보들은 정말 쟁쟁했는데, 그중에서도 최종 수상 후보에 의 김혜수와 의 전도연이 물망에 올라 와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백중세였다. 당시 김혜수는 에서 전라의 파격 연기와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의 내면을 신들린 듯이 열연했고, 전도연은 촌색시와 모던한 도시 처녀의 이중적인 화술로 연기 경력의 최고점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때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김혜수를 강력 추천했다. 두 여배우 중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악녀 이미지를 기꺼이 감수하는 여배우에 대한 저평가를 다시 뒤집어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작품마다 ‘연기 인생의 정점’ 수식

나는 아직도 최은희 선생님의 최고 연기는 의 조신한 과부 역이 아니라 의 양공주 소냐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다.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의 이은심의 연기는 보면 볼수록 소름이 돋는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광기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김혜수의 연기를 재평가하고 싶었다는 게 그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의 전도연이 그녀 생애 최고의 연기를 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빛나는 광채의 호위를 받으며 짜릿하게 웃고 있는 전도연의 활짝 개어 있는 이미지의 편린은 이나 에서 익히 봐 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회의가 한 시간이나 연장될 정도로 심사위원들의 토론은 격렬했지만, 결국 그해 대상은 김혜수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 전도연은 과 을 차례차례 내놓았다. 그때마다 전도연은 ‘전도연 연기 인생의 정점’이라는 언론의 꼬리표가 계속 따라 붙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녀의 연기가 정점에 다다랐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달라진 눈빛

전도연의 연기에는 전도연이 없다. 그만큼 맡은 역할에 물처럼 스며들어 자신을 슬며시 인수분해해버리는 연기자가 전도연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에서 ‘대학은 나중에 나중에 가도 된다’고 중얼거리는 우체국 직원 나영이나, 은행에서 다 흩어진 동전을 그러모으며 ‘100원짜리 동전이 127개’라고 끝까지 우기는 의 보습학원 강사 원주의 모습에서는 생활의 단내가 풀풀 솟아오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도연의 모든 것으로 연기를 이어갔다면, 그녀는 데뷔작인 이나 의 인기 스타에서 주저앉았을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채롭게도 에서 전도연이 맡은 수현의 사이버상 아이디는 ‘여인2’. 누구나 될 수 있는 ‘여인2’의 일반성, 흔히 영화판에서 말하는 생계연기의 한계성이 전도연의 숙명처럼 계속해서 그녀의 그림자 뒤를 따라다녔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그녀가 ‘아 이 여자가 드디어 연기라는 것을 하는구나’라고 영화계 안팎의 모든 사람들을 설득한 혹은 각인시킨 본격적인 연기 인생의 서막은 1999년 에서부터인 것 같다. 는 전도연 연기 인생의 ‘해피 비긴’은 아니었을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스펙터클을 뒤로하고, 내가 에서 본 것은 그녀의 달라진 눈빛이었다. 울고불고하는 자기 새끼를 억지로 수면제로 재운 뒤, 모질게도 애인에게 달려가는 발목이 부을 듯한 욕정에 매달리는 그녀. 그런 그녀가 주진모를 끌어안으며 “우리 어떻게 하니… 우리 어떻게 할까…”라며 남자의 머리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볼 때의 아스라한 눈빛. 그것은 꿈을 꾸는 듯한 아련한 미혹의 안개가 마음의 주변을 맴돌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허기진 외로움이 살짝 내비칠 때의 인간의 실존성, 마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배우의 존재감의 무게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석처럼 관객을 끌어잡아 당겼다. 에서 손톱 밑에서부터 검게 물들어가는 생활의 무게를 견뎌내다 마지막 지지선이 무너질 때, 표독스런 느낌마저 들 정도로 화를 내며 과거의 남자에게 죽기 살기로 대든다. 그런 뒤, 옥상에서 그녀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내뱉은 눈빛 주변에는 직설의 슬픔을 초월한 아련한 외로움의 아지랑이가 가득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전파하는 사랑의 맹목적인 갈구,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내어주고, 늘 사랑에 패배한 듯 보이는 그녀를 온통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흑산도로 도망치듯 떠나가고(), 한겨울의 얼음판 위에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지언정 사랑의 배신만은 떠안고 떠날 수 없는 한 여자의 정한()에 그토록 애련하게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에서 성매매 여성 전도연은 올망졸망한 작은 신의 아이들보다 더 낮은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에서 숙부인 전도연은 가장 고귀한 올림푸스 여신들보다 더 높은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간극에도 주인공에게 물처럼 스며든 전도연은 다시 그 물의 몸을 헤치고 나와, 관객의 마음속에 물·길·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녀에게서 실존의 내음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첩에 동그라미 쳐가며 영화보는 배우

이제 이창동 감독의 에서 피아노 선생 신애는 사랑과 믿음 모두가 등을 돌리는 배신을 당한다. 그녀의 이름자 안에 이미 신·애,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가치가 모두 체화된 것치고는 참 가혹한 운명의 배신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사실 그녀의 삶은 영화 제목과는 정반대의 일기예보로 펼쳐져 나아간다. 영화 제목은 밀양, 숨겨진 양지 혹은 햇살이 빽빽한 양지라는 이중적인 뜻인데(실제로 영화는 신애가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와 쓰러지는 단 한 장면만 빼고 영화 내내 햇살이 낭창하다), 그녀의 삶은 아들 죽고, 서방이 배신하고, 구름과 비바람 투성이이다.

아마도 이 가운데 변화하는 신애라는 캐릭터의 무한 변주, 마치 파헬벨의 캐논 D장조가 무한대로 변주되듯 인생의 곡절곡절의 구비마다 ‘남자를 믿다 안 믿다, 돈을 믿다 안 믿다, 신을 믿다 안 믿다’하다, 심지어 자신마저 ‘믿다 안 믿다’하는 그녀의 곡절은 자칫하면 관객을 설득하는 데 무게중심을 잃을 여지가 다분했다. 지는 이를 두고 ‘주요 캐릭터들의 갈등을 영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내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한 것 같다. 그러나 똑같은 의 말대로, 전도연이 의 기어를 모두 바꾸어놓았다. 그녀는 광기의 늪 속에 아주 천천히 빠져들어가서, 물이 끓고 있는데도 너무 천천히 끓어 결국에는 비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삶아져가는 개구리처럼 서서히 자신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간다. 전도연 그녀는 그 수줍음, 그 속물성, 그 절망, 그 구원, 그 기쁨, 그 배신감, 그 광기를 오장과 육부의 명치끝이 저려오는 강도로 밀어붙인다. 그렇게 은 감독의 말대로 하늘에서 시작해 땅에서 끝난다. 신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믿음의 문제로 시작해 사랑의 문제로 끝난다. 그리고 이창동에서 시작해 전도연으로 끝난다.

지난 5월28일,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칸에서 날아든 낭보를 접하며, 문득 씨네큐브 극장에서 혼자 앉아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던 그녀가 생각났다. 1년 반 전, 우연히 극장에서 만나서 반가워했는데 전도연은 수첩에 동그라미까지 쳐가며 열심히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을 보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아서 무엇을 볼까 궁리하는 중이라며, 다르덴 형제의 을 보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영화 평론가보다 더 영화를 많이 본다”고 놀렸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요즘 들어오는 영화가 없어서”라고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공교롭게도 다르덴 형제의 은 영화 미학에서는 과 완전히 다르지만, 그 주제만큼은 과 매우 흡사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잃은 한 목수가 아들을 죽인 소년범을 용서할 것인가 하는 문제. 서양인들이 언제나 좋아하고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죄의식과 용서 그리고 구원의 문제. 그러니 이창동 감독 같은 이의 날개를 달 수 있다면, 전도연의 ‘여인2’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전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수상이 입증한 셈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하지 마시라

그리하여 그녀는 살아남았다. 세계 영화제 수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자벨 위페르처럼, 잔느 모로처럼, 메릴 스트립처럼 전도연은 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90년대 전도연은 한국 영화가 전성기에 진입할 때, 데뷔를 해서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고 있다. 한국 영화의 산업적 영향력과 비례하는 연기자의 삶을 살아 왔다. 솔직히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자벨 위페르나 메릴 스트립 같은 대배우들과 달리 전도연, 그녀의 배우의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잔 모로가 에 출연했던 바로 그 나이,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라. 무엇으로라도 살아남으라. 제발 그녀에게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하지는 마실 것.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은 ‘전도연 연기 최고 정점’이 아니라 ‘전도연 그녀에게 무엇이 더 있을까’ 기대하는 것이라고 하니. 당분간 전도연의 라이벌은 전도연 그 자신. 칸 이후, 그날 이후, 전도연이 이제 벼려야 할 대상은 ‘포스트 전도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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