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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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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 어떤 곳이에요?”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이창동표 영화 이 드러낸 어디서나 일어나는 고통과 구원의 이야기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밀양은 번역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한글로 밀양은 낯익은 지명이어서 무의미에 가깝지만, 한자로 표기된 밀양(密陽)은 곱씹어보면 ‘햇볕이 빽빽한 동네’라는 매혹적인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영화 의 영어 제목은 〈Secret Sunshine〉. 비밀스러운 햇볕 혹은 햇볕에 깃든 비밀을 뜻하는 번역으로 영화의 핵심을 품는다. 이야기를 요약건대, 이창동 감독의 은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한 여인이 무간지옥의 현실에서 구원을 갈구하면서 의심하면서 나아가는 영화다.

이렇게 ‘햇볕에 깃든 비밀’은 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대사로 쓰이는데, 실제로 영화는 밀양의 하늘을 비추며 시작하고, 밀양의 땅을 비추는 햇볕을 응시하며 끝난다. 그리하여 “밀양이 어떤 곳이에요”라는 질문은 영화를 일관(一貫)하는 주제고, 대사의 시종(始終)을 장식한다. 밀양 사람 종찬(송강호)은 서울 사람의 똑같은 질문에 다르게 답한다. 처음에 신애(전도연)가 묻자 “인구가 많이 줄어들고… 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라고 답하고, 마지막에 신애의 동생이 묻자 “똑같아예. 딴 데하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예”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은 밀양이라는 소도시 공간을 빌려서 말하지만, 세상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고통과 구원의 얘기인 것이다.

신애의 허세 앞에 돌아온 아들의 주검

카센터 사장 종찬은 마중을 하듯 신애의 자동차 핸들을 잡고 밀양으로 들어온다. 신애의 자동차는 밀양으로 오던 중에 밀양 외곽에서 고장이 났고, 신애는 카센터로 연락을 했으며, 종찬은 차를 고치러 간다. 결국 그것은 신애를 맞이하는 종찬의 행위로 보인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으로 살러 온 신애를 밀양은 손들어 환영하지 않는다. 종찬의 도움을 받아서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열지만, 신애를 보는 ‘지역민’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소도시 특유의 떠도는 말들이 신애의 신경을 건드리고, 지역민 특유의 무신경이 서울 여자 신애를 불편하게 만든다. 신애는 나름대로 소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선방’을 날리는데, 집 지을 땅을 구하는 행세로 돈냄새를 피우는 것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신애의 허세는 예상치 못한 참척의 고통으로 돌아온다. 신애의 ‘가장 나종 지니인’ 존재였던 아들 준이가 유괴된다. 범인은 남편의 보험금을 들먹이며 신애의 돈을 요구하지만, 실은 신애의 통장에는 약간의 잔고만 남았을 뿐이다. 결국 아들은 주검으로 돌아오고, 신애는 극한의 고통에서 구원을 갈구한다. 이미 신애에게는 또 다른 비밀이 고통으로 남아 있다. 신애의 남편은 사고를 당하기 전에 신애를 배신했지만, 신애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는 방법으로 남편이 생전에 살고 싶어했던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온다.

한국 기독교도 심도 있게 묘사

신애의 고통스러운 등 뒤로 종찬의 안타까운 시선이 스민다. 노총각 종찬은 시종일관 신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신애를 돌본다. 신애에게 “사장님 같은 분을 두고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속물!”이라는 말을 듣고도, 신애의 동생에게 “사장님은 우리 누나 취향이 절대 아니에요”라는 ‘팁’을 얻고도 종찬은 그저 웃는다. 심지어 아들을 잃고 정신을 놓은 신애가 아들의 유괴범을 집에서 보았다는 황당한 말을 늘어놓아도 “제가 내일 한번 알아볼게요”라고 선선히 달래는 지극한 사랑이다. 적당히 수줍어하면서 너무나 통속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종찬의 사랑은 종국에 너무나 귀엽다. 정신을 놓은 신애가 종찬을 ‘희롱하며’ 부르는 의 가사,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그저 눈치만 보고 있지~ 늘 속삭이면서도 사랑한다는 그 말을 못해~”에는 이러한 종찬의 사랑법이 녹아 있다.

은 이창동‘표’ 영화다. 그의 전작들처럼 어쨌든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고, 통곡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이창동의 인물들이 토하는 신음 소리가 너무 길다고 불만을 느낄지 모르지만, 은 통곡을 멈추지 않는다. 어두운 극장을 나온 다음에 의 이미지는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하는 신애의 등으로 남는다. 감당치 못할 불행 앞에서 흐느끼는 등으로 시작해서, 불행을 이겨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다 멈칫하는, 이창동의 인물을 신애도 반복한다. 그리고 신애도 결국은 이창동의 그들처럼 한줄기 햇살에서 구원의 기미를 감지한다. 지금, 여기서, 구원의 방식은 자주 기독교적 형식을 취하므로 신애도 ‘주님’에게 구원을 구한다. 아들마저 잃고 통곡하던 신애는 믿음을 얻고서 “저 이제 괜찮아요. 꼭 연애하는 느낌이에요. 누가 나 사랑해줄 때 느낌 있잖아요”라고 말하지만, 그의 구원은 머잖아 시험에 든다. 신애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면회하러 간다. 하지만 신의 힘으로 용서하러 갔다가, 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신애는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가 있어요”라고 절규한다.

신애의 고통에 눈물이 맺히되 흐르진 않는다. 이 처절한 고통을 다루되 신파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애의 등을 타고 흐르는 처연한 정서로 충분히 슬픔은 전달된다. 이렇게 은 눈물을 짜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와 돌아보면, 의 마디마디에 의미심장한 암시가 깔려 있다. 아들 준이가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것도, 웅변학원 원장이 신애를 어색하게 바라보는 모습도, 동생이 땅을 보러 다니는 누나에게 “뭐하는 짓이야”라며 말하는 의미도, 나중에 읽히는 사건의 전조다. 밀양으로 대표되는 소도시의 일상도 과장되지 않으면서 적나라하다. 적당히 왕따도 시키고, 적당히 온정도 흐르는 소도시의 일상이 음습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게 그저 봄날의 햇살처럼 투명하게 ‘쨍하게’ 드러난다. 의 또 다른 의미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심도 있는 묘사를 담은 점에 있다. 서울에서도, 밀양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늘 한국 개신교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에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때로 성스럽다. 요컨대 유치한 풍경 가운데 성스러운 순간이 있다. 이렇게 은 ‘반기독교’도, ‘친기독교’도 아닌 오늘의 기독교에 대한 풍경화다. 더구나 그것은 고통받는 신애의 구원의 문제와 이어지면서 고통받는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폭발하는 전도연, 유영하는 송강호

에서 전도연은 폭발하고, 송강호는 유영한다. 전도연의 연기는 뜨겁되 격하지 않고, 송강호의 연기는 감정을 들었다 놓아야 할 지점을 정확히 파악한다. 이렇게 전도연과 송강호의 연기는 에 깊이와 온기를 더한다. 은 한줄기 햇볕(Secret Sunshine)을 비추며 끝난다. 이창동 감독은 말했다. “분명한 것은 신애는 이 땅에서 밀양 같은 현실에서 앞으로도 살아야만 하고 그 현실에 땅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닮아 있는 종찬이라는 남자가 서 있고, 앞으로도 곁에 있을 거란 말이다.” 그것은 밀양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현실인 만큼, 신애의 것만이 아닌 저마다의 사연이다. 5월2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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