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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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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혁, 연기 잘하는 에릭을 넘어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연기가 과장됐단 평에도 논란은 반길 만한 소란, 시청자는 더 이상 가요계의 신화를 보지 않으니…

▣ 이화정 〈magazine t〉 기자

문화방송 주말 연속극 의 시청자 게시판이 요즘 뜨겁다. 드라마 자체의 화제 때문이 아니다. 바로 주연 강태주 역할의 에릭이 직접 게시판에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 첫 방송 직후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까 걱정이다. 그러나 일개 사공으로서 열심히 노를 젓겠다”는 글을 남기는가 하면 “전 여러분이 방심하고 있을 때만 찾아옵니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귀신의 집처럼”이라는 글을 남김으로써 언제든 자신이 팬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밝혔다.

4차원 인간의 스스럼없는 행동

물론 에릭의 이런 스스럼없는 행동은 ‘4차원 세계’에 사는 에릭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의 게시판을 향한 에릭의 뜨거운 관심은 그만큼 에릭에게 이 드라마가 중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는 지난해 촬영 도중 허리를 다쳐 에서 도중 하차한 이후 근 1년 만의 복귀 작품. 에릭을 못 믿겠다는 감독의 걱정에도 열심히 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적극적으로 뛰어든 작품이다. 에릭의 각오는 높이 사줄 만하지만 결과는 그리 밝지 않다. 3월31일 방송 시청률이 전국 9.6%로 동시간대 시청률 최하위를 기록하며 고전했다. 벌써 방송 7회차를 마친 지금, 의 사정은 좀체 낳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의 후속작인데도 후광을 받지 못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의 김윤철 PD의 작품, 에릭 주연의 주말극이라는 기대 속에 출발한 것치고는 분명 기대 이하의 성적이다. 누구보다도 타격을 입은 것은 에릭 자신이다.

에서 에릭은 강태주로 분한다. 부와 지성 양쪽을 모두 가진 여자 차혜린(윤지혜)과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여자 한은수(정유미) 사이에서 연애 게임을 즐기는 바람둥이 강태주는 지금껏 그가 보여준 캐릭터와 전혀 다른 색다른 도전이다. 각기 다른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얼핏 멜로드라마의 뻔한 남자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강태주는 전형적인 모습을 비껴간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다. 그는 순진한 여성인 은수로 인해 감상적인 애정으로 쉽사리 빠져들지 않으며, 돈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기라도 할 듯 차혜린에게 덤벼들지도 않는다. 돈과 연인은 강태주에게 저울질할 수 없는 똑같은 비중의 무엇이며, 돈을 선택하는 자신에게 섣불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감상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그 자체로 완벽한 판단과 확신 속에 살고 살아갈 것 같은 남자다. 에릭은 이렇게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캐릭터 강태주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2004)의 젠틀한 서정민에게도, (2005)의 발랄한 강호에게도 기대서는 안 된다. 에릭은 지금까지 한 모든 역할의 속성에 도움받지 않고 강태주를 연기한다.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눈

“에릭의 연기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다”며 에릭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는 몇몇 시청자들도 있다. 그러나 연기를 시작하던 초반의 어색함을 덜어냈는데도 과장된 그의 연기에 대한 혹평 역시 만만치 않다. 찬반 의견이 분분함에도 배우 에릭으로 볼 때 지금의 논란은 반길 만한 소란이다. 다름 아닌 시청자들이 에릭을 더는 가요계에서 신화를 일궈낸 ‘신화’의 멤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미숙한 시선 처리와 발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의 서정민 때보다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문화방송 미니시리즈 (2003)에서 ‘상식’을 연기하면서 ‘가수가 그럼 그렇지’라는 혹평과 함께 연기를 시작하던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이라는 히트작을 이끌어간 주연배우이자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영화 에서 신은경과 투톱을 이루어 활약한 전적을 가진 배우기도 하다.

지금, 에릭의 심적 부담은 그가 고스란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진통이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현장에서 스스럼없는 그를 두고 주위에서 ‘신인배우치고 너처럼 편한 놈 첨 봤다’고 할 정도였다. 에릭 역시 ‘나는 가수니까, 얼마쯤 못해도 돼’라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의 호평으로 에릭은 연기를 알았고, 본명 문정혁을 사용한 의 강호로 인해 연기의 맛을 알았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가수 에릭’으로 불리길 바랐던 신인가수처럼, 달뜬 마음으로 지금 에릭은 ‘연기자 에릭’으로 진지하게 불리길 원하고 있다. 표면적인 변화로 그는 그룹 신화의 소속사 굿이엠지에서 별도로 연기자 생활을 체계적으로 매니지먼트하는 새로운 회사 탑클래스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명실공히 ‘배우’ 에릭으로 변모했다.

손쉬운 해답은 역시 그의 잘생긴 외모에서 비롯된다. 반듯한 콧날과 짙은 눈썹, 균형 잡힌 마스크는 ‘너무 잘생겨서’ 연기에 제약을 받았다고 말한 톱스타 장동건의 경우처럼, 에릭을 수식하는 가장 화려한 날개다. 그러나 만약 에릭이 자신의 외모에 갇혀 있었다면 다양한 캐릭터의 변신을 수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묘하게도 그는 뿜어내는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눈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다. 의 강태주가 큰 눈을 극대화해 자신의 자신감을 담아야 한다면, 의 강호와 그걸 벤치마킹한 SBS 의 최강은 눈을 조금 작게 뜸으로써 특유의 어설픈 인상을 발휘해낸다. 이 극적인 변화에서 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시청자들은 에릭의 눈에서 미처 그 간극을 발견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자유로운 눈의 활용은 평범한 캐릭터를 수행하기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오뚝한 그의 콧날을 무너뜨리면서 에릭에게 배우라는 옷을 입혀준다.

“떳떳한 배우로 소개할 날이 왔으면”

에릭은 아직 과도기의 배우다. 배우로 발을 디디지 않은 그에게 연기력은 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겉돌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는 늘 지적받았던 발음과 발성의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가며 배우 에릭의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그가 에서 보여주는 위태로움은 ‘연기 잘하는 에릭’이 아닌 ‘배우 연기자’로의 완전한 도약을 시험받는 데서 나온다. 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연일 ‘시청률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격려의 문구가 올라온다. 지금, 에릭이 가지는 부담감 역시 100% 시청률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나 자신을 떳떳한 배우로 소개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에릭의 말에 정답이 있다. 지금의 강태주는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 변화의 과정이 주는 아슬아슬함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배우 에릭을 숨죽여 지켜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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