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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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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짼 훨훨 영화 하고 싶다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100번째 영화, 첫 번째 ‘러브스토리’ 내놓은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러브스토리’로 알려졌다. 이청준의 단편집 중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은 에는 의 주인공들이 또다시 등장한다. 소리꾼 유봉(임진택)에게는 딸 송화(오정해), 아들 동호(조재현)가 있다. 남매로 만났지만, 유봉이 데려온 송화와 동호는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다. 이들은 크면서 서로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되지만, 남매의 인연은 이들의 사랑을 막는다. 결국 동호는 가출을 하고, 송화는 눈이 먼다. 동호는 송화를 찾아다니고 송화도 동호를 그리워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좀처럼 닿기 어렵다. 은 이어질 듯 끊어지는 이들의 애틋한 인생을 따라 진행된다. 가 득음의 경지에 오르려는 예술혼을 중심에 두었다면, 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소리로 풀던 사람 소리로 자유를 얻다

러브스토리라고 하지만, 결국 맺어지는 사랑은 아니다.

=그렇게 달콤한 영화가 아니고, 둘이 다 멀리서 놓고 평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히려 애절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찍었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에서도 송화와 동호가 결국 만나서 소리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에서는 대사로 (그걸) “소리로 풀었다”고 했다. 은 ‘소리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고 해야 할까.

풀어서 설명하면?

=주인공들은 평생을 소리 안에 묶여 살고 있었다. 묶인 삶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다.

그렇게 세속을 뛰어넘은 사랑을 해봤나. (웃음)

=그런 사랑을 못해봤으니까 그런 얘기를 찍고 있는 것 아니겠나.

요즘의 영화 관람 풍토에 이 잘 맞을까 걱정도 들겠다.

=상당히 많다. 아주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사실 때도 젊은 관객과 무관한 영화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뜻밖의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도 같은 염려를 하지만, 기대도 생긴다. 젊은 관객들이 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면, 나도 좀 큰일을 해낸 것이고.

임권택 감독은 “가 판소리를 영상으로 보충해서 보여준 측면이 강했다면, 은 소리 자체를 두 사람의 삶 안에 깊숙이 물려 들어가게끔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가 판소리를 위한 뮤직비디오 성격이 강했다면, 은 드라마에 음악을 녹이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등에서 판소리와 화면의 조화를 꾸준히 시도해온 임 감독은 “나로서는 (을 통해) 큰 진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실제 의 영상은 소리와 충돌하면서 조화한다. 동호가 “하늘과 땅이 어떻게 저렇게 어울릴까”라고 읊조릴 만큼 편안한 자연 풍광 속에서 송화는 “무슨 물이 막혔건데 내 님은 못 오시나~”라고 구슬프게 노래한다. 자신이 ‘모시던’ 백사 노인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 송화는 “깬 꿈도 꿈이오~”라고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벚꽃이 흐드러지는 장면은 송화의 노래와 더불어 잊지 못할 여운을 남긴다.

이 보다 어떤 면에서 더 나아갔다고 생각하나.

=는 소리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던 세대가 소리를 좀 가깝게 느끼는 효과를 결과적으로 낳았다. 에서는 소리를 두 사람의 사랑 얘기 안에 깊숙이 물려놓았다. 예컨대 송화가 의 한 대목을 부르면, 두 사람의 삶과 견주어서 자신들의 사랑 얘기를 소리로 읊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시켜보자고 생각했다. (판)소리 쪽에서 보자면, 두 사람의 사랑 얘기에 얹혀서 자기도 살고, 두 연인 쪽에서 보자면 애절하고 비탄스러운 사랑의 얘기를 소리로 보충받고. 서로 보완을 해가는 식이다.

촬영을 한 해 꽃이 정말 좋았다

백사 노인이 임종하는 장면의 노래가 인상적이다.

=의 흥타령이다.

흥타령이 그렇게 슬픈가.

=이상하게도 그 안에 그게 들어 있다. 에서도 같은 노래를 썼다. 나는 새떼를 보면서 우리 민족이 떠돌이로 살아온 비애를 그렸다. 거기서도 그런대로 (느낌이) 살아났지만, 이번에는 그 소리의 진짜 면목과 딱 맞는 삶의 대목에 썼다. 노인이 친일해서 악착같이 돈을 번 부잔데, 그런 삶 자체가 부질없는 것 아니냐 하는 것에 갖다대고 있으니까.

송화가 백사 노인의 후실로 들어갔던 이유는 동호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지만, 노인이 자기 소리를 가장 깊게 이해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 자기를 싸안아준 사람에게 ‘에라, 거기나 좀 기대고 살자’ 그런 거지.

노인이 임종하는 별당을 감싸며 벚꽃이 휘날리는 장면이 아름답다. 컴퓨터그래픽(CG)을 썼다고 생각할 만큼 몽환적인데.

=편집하느라 집에서 러시 필름을 보고 있는데 아들놈도 “CG 잘됐네요” 그러더라. 전혀 CG를 쓰지 않았다. 좋은 해도 있고 아닌 해도 있고 해마다 꽃은 알 수가 없는데, 촬영을 한 지난해 꽃이 최고로 좋았다. 꽃잎이 화면 위로 올라오는 장면도 있는데, 인공적인 바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바람이 그렇게 좋았다. 꽃보라가 날렸다.

임권택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한반도의 자연이다. 는 송화의 소리와 함께 굽이진 비탈길로 기억된다. 이렇게 한국인은 임권택의 카메라를 통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발견했다. 의 몇 장면은 눈물이 나올 만큼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전체적으로 풍광이 주는 감흥이 만큼 강렬하지는 않다.

이번에도 사계를 담았나.

=그렇다. 하지만 잘 의식하지 못했을 거다. 는 계절 자체를 앞으로 내세워 찍었던 영화다. 이번엔 계절이 아니라 사람 사는 것을 앞에 놓았다. 그러나 그 안에 계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호가 송화를 위해 지은 집이 인상적이다. 시각장애인이 살기에 좋도록 문턱을 없애고, 입구에는 맷돌로 다리를 놓고, 방마다 문짝에 다른 무늬를 넣어 방을 구분하도록 했다.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다. 둘이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어디선가 드러내야 되는데, 만날 떨어져 살고 찾아다니고…. 드러낼 방법이 없어서 거기다 자리를 잡은 거다.

요즘의 장애인 편의시설만큼이나 과학적이고 세심하다.

=동호가 아마도 시각장애인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동호가 송화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집을 지으면서 저기(장애인) 학교에도 가고, 공부 많이 했다.

어쩌면 은 ‘문득’ 하고 끝난다. 아직도 얘기가 남았다 생각할 무렵에 영화는 그대로 멈춘다. 그래서 오히려 여운이 남는다. 감독은 “나로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한 편에 뿐 아니라 등이 집대성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큰 한국화를 그리려 했다

판소리 영화를 만드는 하나의 순환이 마감됐다고 느끼나.

=나 을 보면, 내가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소화불량증에 걸린 장면도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에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소리가 많이 들어간 영화를 할 생각이 있는가.

=여기까지 왔으면 된 거 아닌가 싶다. 내 능력으로는.

영화의 주제가 일편단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소리에 대해서.

=그렇다. 그걸 조금 더 넘어서 둘이 훨훨 세속적 묶임에서 벗어나면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까지 나갔다고 보이면 좋겠다. 서로를 향한 한마음에서, 마음까지 풀리는 영화로 말이다.

이번에는 임권택 감독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영화 본 느낌, 총체적 느낌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처연함에서 물기를 말린 느낌, 한발 물러선 처연함”이라고 답했다. 감독은 “비애스러운 사랑 이야기에 판소리 가락을 실어 보내고는 있지만, 이라는 영화 안에 선대들이 살면서 누렸던 풍류스러운 것, 흥스러운 것, 맛스러운 것, 이런 것들을 심어넣으려 했고 관객이 그것을 알아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총체적 느낌으로는 “큰 한국화를 그리려고 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거장은 에서 때때로 실제의 산과 강으로 산수화 같은 그림을 그린다.

안타까운 사랑이다. 그래도 슬프지만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영화로 보이길 원했다. 소리로 ‘자유를 얻었다’는 얘기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맺힌 것으로부터 풀어졌구나 하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은 해원에 대한 영화라는 뜻인가.

=그렇게 보면 선명하겠다.

그렇다면 감독도 예전과 다른 정조로 영화를 만들었겠다.

=13년 전에 를 찍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삶이 한을 쌓는 일이라고 할 만큼, 우리 안에 앙금처럼 한이 쌓여 있었다. 지금은 많이 풀어졌다. 만날 한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정서도 에서 만큼 편안해졌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수난의 시대가, 군사정권이 끝나지 않았나. 검열에 묶여서 살았던 나 같은 사람에게 지금의 자유는 거의 완벽한 자유로 느껴진다. 검열을 너무나 당해서 자기 검열이 몸에 익은 시절도 있었다.

군사정권이 끝나고도 자기 검열 풀리려면 시간이 걸렸겠다.

=지금도 후유증을 앓고 사는데….

별별 영화 다 합쳐 100편, 껄끄럽다

100번째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시련도 있었다. ‘스타’를 캐스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의 제작이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영화사 ‘KINO2’가 제작에 나서면서 은 완성됐다. 임 감독은 “나 같은 나의 흥행 영화는 모두 신인을 주인공으로 기용해서 성공했다”며 “스타가 없어서 투자자가 발을 빼는 사태가 나니까, 내가 감독으로서 여기까지 내려앉았다는 생각도 들고 정신적인 타격이 컸다”고 돌이켰다.

100번째 영화를 하게 된 비결이 뭔가.

=어쩌다 단순히 오래 했을 뿐이다.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영화계에서 밀려나면….

실업자가 되는 건가.

=(웃음) 그러니까 죽었다 하고 영화를 찍어낸 거지. 사실 누가 물어보면 대답하기 껄끄러운 게, 초기에 (반공영화 등) 별별 영화를 다 찍었는데, 다 포함해서 100편이니까 껄끄럽고 그렇다.

101번째 영화는?

=아직 생각 안 하고 있다. 사실 101번째는 조금 자유롭게, 훨훨 영화를 하고 싶다. 100번째라든가, 영화제에 내보낸다든가, 사람을 압박하는 것들이 늘 덜미를 잡고 있었는데, 그런 것에서 조금 벗어나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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