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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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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끝을 본다, 흥건한 피로

등록 2007-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하드보일드’에 충실한 계속되는 ‘칼질’…재일동포 최양일 감독의 첫 ‘한국산’ 영화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영화 관람에 해로운 스포일러 있습니다

찌르고, 쑤시고, 쏘아대고, 내려친다. 목을 긋고, 귀를 베고, 눈알을 뽑고, 심장을 찌른다. 물론 선악은 모호하다. 폭력은 주어진 상황이고, ‘칼질’은 생존을 위한 행위다. 조폭도, 경찰도, 복수하려는 자도, 복수를 피하려는 자도 옆구리를 찌르고, ‘배때기’를 쑤시고, 머리통을 쏘아대고, 뒤통수를 내려친다. 최양일 감독의 가 상영되는 스크린은 피로 흥건하다.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라는 영화 홍보문구를 상영시간 내내 온몸으로 재현한다. 하지만 스크린이 피로 흥건한데도, 가슴은 비정한 정서로 흠뻑 젖지 않는다.

‘뜻밖의’ 혹은 ‘난데없음’

는 복수(復讐)의 수가 아니라 목숨을 뜻하는 수(壽)다. 하지만 는 복수의 영화다. 쌍둥이 형제는 비정한 거리에서 살아간다. ‘수’로 불리는 형 장태수(지진희)는 마약조직 보스의 약가방(혹은 돈가방)을 훔치다 도망친다. 벌은 동생이 받는다. ‘진’으로 불리는 동생 장태진은 극악한 마약상 구양원(문성근)에게 볼모로 잡힌다. 그렇게 형제는 헤어지고, 세월은 흐른다. 태수는 청부살인을 일삼는 해결사가 되고, 태진은 경찰이 된다. 서로 애타게 찾던 형제는 19년 만에 마침내 만나게 되지만, 형 앞에서 동생은 머리에 총알을 관통당해 즉사한다. 형은 동생의 주검을 숨긴다. 그리고 동생이 되어서 동생을 죽인 놈들을 찾아나선다. 그는 동생의 얼굴에 있던 흉터를 자신의 얼굴에 새기고, 동생의 경찰복을 입고 복수에 나선다. 동생처럼 경찰이자 ‘동생의 여자’인 강미나(강성연)는 ‘진’으로 ‘수’가 변장한 것을 알아보고, “난 필요 이상으로 구린내를 잘 맡지”라고 주절거리는 나쁜 형사 남달구(이기영)도 해결사 ‘수’를 알아챈다. 머지않아, 동생을 죽인 존재가 드러난다.

에서 동생을 죽인 사람은 누굴까, 의문은 중요치 않다. 구양원이 장태진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는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는다(그저 경찰이 된 장태진이 구양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암시만 나온다). 그냥 죽였다,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니 복수를 해야 한다, 당연한 결론이 나온다. 이런 식이다. 해결사 ‘수’의 정신적 지주인 송인(조경환)의 죽음도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럽다. 그저 구양원이 송인의 화랑으로 찾아오고 둘의 눈길이 한 번 부딪히는 장면이 암시로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송인이 살해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처럼 뜨거운 싸움질을 쿨하게 그리는 ‘하드보일드 클래식’ 의 정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뜻밖의’ 혹은 ‘난데없는’이 되겠다.

최양일의 하드보일드에는 예고편이 없다. 주먹이 순식간에 날아오고, 뒤통수에 칼이 느닷없이 꽂히듯이, 이야기도 복선 없이 이어진다. ‘수’는 ‘진’으로 변신해 출근한 첫날, 동생 진을 쏘았던 점박이(오만석)를 다른 폭력사건의 피의자로 대면한다. 수는 그렇게 동생을 죽인 배후를 알게 된다. 미나는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자신의 애인인 진이 아니라 수라는 사실을 ‘서서히’가 아니라 ‘한눈에’ 눈치챈다. 진을 죽인 놈들을 쫓는 수를 사랑하게 된 미나와 수의 멜로신을 기대하면, 갑자기 수를 노리는 놈들의 드릴이 그들의 집으로 불쑥 들어와 액션신으로 전환된다. 인물의 구실도 예상과 다르다. 수를 뒤쫓던 남달구가 마침내 수에게 총을 겨누고 결정적 역할을 하겠다 싶은 순간에, 뜻밖에 총을 맞고 쓰러져버린다. 그리고 영화에서 남달구는 사라진다. 는 정말 ‘사나이’의 방식처럼 감정을 길게 끌지 않고, 중요한 순간과 말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후반에 이르면 칼질도 지겨울 정도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말하는 간결한 스타일은 대사가 몇 마디 나오지 않아도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기에 리얼한 액션신과 자동차 추격신 같은 장면이 더해진다. 의 액션은 박진감이 넘치기보다는 리얼리티가 가득하다. 그래서 ‘칼질’에 한숨을 쉬거나 소리를 지를 만큼 현실로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찌르고 쑤시는 장면은 때때로 징글맞지만, 한동안 기억될 장면도 있다. 침대에 누워서도 불안해 칼을 손에 들고 자던 ‘수’가 몸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지진희는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해 보인다. 하지만 피가 튀는 만큼은 아니지만, 가끔씩 ‘튀는’ 대사에 실소를 짓는 사람도 있다.

에서 죽는 자들은 때때로 웃으며 죽는다. ‘칼질’을 당해서 쓰러지는 자,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자, 세상을 비웃듯 슬쩍 웃음을 머금는다. 가끔은 이렇게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스치듯 지나가지만, 는 끝없이 쑤시고 한없이 찔러서 후반에 이르면 칼질이 지겹다. 리얼한 액션신은 처음엔 신선하지만, 갈수록 수가 ‘불사조’가 되는 전개는 현실감을 잃어버린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면 만화적이라는 느낌까지 드는데, 알고 보면 원작이 만화다. 영화 는 신영우의 만화 을 원작으로 삼았다. 끝없이 계속되는 피범벅 속에서 정작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복수였는지는 잊혀진다. 복수를 원하는 수에게 송인이 “네가 살아온 세계의 룰을 깨면서 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묻자 수는 “속죄”라고 답한다. 하지만 속죄는 와 닿지 않는다. 속죄는 잊혀졌다가, 마지막 사투를 벌이던 수가 “태진아 기다려. 이제 10명만 죽이면 구양원이야”라고 말할 때, 새삼 동생의 복수극이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최양일 감독의 전작인 에는 드라마가 풍부했다. 풍부한 드라마는 폭력에 맥락을 주었다. 하지만 드라마가 약한 에서는 폭력만이 반복된다.

‘수’ 받을만한 배우들의 연기 향연

그렇다고 가 폭력을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반면에 폭력을 통해서 폭력을 반성하는 방식도 아니다. 는 그저 폭력이 존재하는 세계를 전시하는 ‘하드보일드’ 전통에 충실하다.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극한으로 밀어붙인 정서다. 하지만 거듭되는 액션신에 굴곡이 부족한 얘기는 영화를 평면적으로 만든다. 감독은 “그저 죽은 동생에 대한 태수라는 인물의 복수심만으로 영화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던 한 남자가 동생을 위한 복수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인생 목표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수’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배우들은 ‘수’에 가까운 점수를 줄 만한 연기의 향연을 벌인다. 지진희는 을 지나 로 오면서 연기가 한 걸음씩 발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몸을 쓰는 열연은 물론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에도 발전을 보여준다. 문성근도 모처럼 호연을 했다. 극악한 마약조직 두목을 연기한 문성근은 놀라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의 첫 대사를 듣는 순간, 흠칫 놀랄 만큼 평소와 목소리가 다르다. 문성근은 설명투의 목소리가 캐릭터와 맞지 않아서 성대를 살짝 긁어 허스키한 목소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점박이를 연기한 오만석은 드라마에서 조금은 지루해 보였던 얼굴에 강렬한 인상을 새기고, 이기형도 비열한 형사인 남달구를 자연스레 소화했다. 는 일본에서 23년 활동해온 재일동포 최양일 감독이 한국에서 만든 첫 번째 ‘한국산’ 작품이다. 3월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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