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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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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억압을 쏘고 싶었다

등록 2007-03-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영화 의 감독 박정우와 주연배우 감우성의 제작 뒷담화…“정답이 없는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기회되길”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정리 김은형 한겨레 주말판 준비팀dmsgud@hani.co.kr

3월14일 개봉하는 영화 는 세상이 요구하는 모든 약속과 규칙에 순종하고 사는 소시민의 짧고도 긴 하루를 그린다. 세상은 참고 사는 그를 계속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의 작은 반항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 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출신 박정우 감독(38)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박 감독과 주인공 박만수를 연기한 감우성(37)이 7일 오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나,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게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의 지난함과 일탈의 욕망, 소시민의 꿈과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집-교회’의 틀에 갇혔던 청소년기

박정우(이하 박) 주인공 박만수라는 인물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저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인물이다.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흐르는 대로 살지만은 말자는 게 의 주제인데, 바로 박만수가 그렇게 사는 인물이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건지 생각 한 번 안 해보고 교육받은 타성대로 살아온 그런 사람 있지 않나.

감우성(이하 감)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나 이상의 차원이 아니라 자식만큼은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자식들을 키웠다. 그것이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나 획일적인 교육열로 자리잡게 된 것이고. 나 역시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지만 지금의 삶이라는 게 그런 논리는 가당치 않은 환경에 처해 있다. 모두가 안전한 삶을 강요했지만 사회가 그렇게 순리대로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제공했는가, 그렇지 않다. 쉽게 얘기해 먹고살 방법을 못 찾는 젊은이도 많다. 부모 세대에게 정당한 이유는 있지만 자식들에게 책임 있는 상황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이런 마음을 갖고 박만수를 연기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착하게 살아야 행복하고 복 받는다라고 배워왔다. 그러다가 착하게 살면 오히려 더 푸대접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됐다. 그것에 대해 배신감을 표출하고 분노를 표현하려고 하면 “참고 사는 게 상책이다”라며 사회의 규칙이나 제도들이 윽박지르며 순순히 따라오게 하더라.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졌던 꿈은 먼 옛날의 추억거리로 묻어둔 채 하루하루 비슷한 모습으로 연명하는 게 이 세상의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꿈은 있는데 현실에서는 꿈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조금씩 비껴나 있는 사람들이다.

박만수가 가졌던 레이서의 꿈처럼 부모의 금지나 사회적인 무언의 압력으로 포기한 것들이 있나.

감우성씨나 나는 그래도 비교적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 사는 사람들이긴 한데, 작가와 감독 생활을 하며 가장 아쉬운 것은 학교-집-교회, 세 군데만 맴돈 청소년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판에 들어와 창작을 하다 보니 경험이 전무하더라.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참고 표현 못했던 불만들이 글의 재료가 됐다. 사소한 일탈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경험이 나에게 있었다면 내 얘기가 좀더 풍성하고 사실적일 텐데 이제 와서 책이나 보며 간접 경험을 해야 하니 지나온 시절이 아쉽고 억울할 뿐이다. (웃음) 물론 영화에서처럼 아버지 탓이라기보다는 내가 생겨먹은 게 이러니까 알아서 엄마 말 잘 들어야 하는 거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겠지 이러면서 살았다.

‘편의점 강도신’ 수위조절 고민해

가끔 연기하면서 만수에 감독님의 과거나 생각이 투영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만수가 직장에서 왕따당하는 거 보면 감독이 군대에서 고문관이었을 거 같기도 하고, (웃음) 도입부에서 뒷차들 빵빵거리는데 천천히 운전하면서 “규정 속도대로 가고 있거덩” 하는 만수의 말투도 감독님 말투를 흉내낸 거다.

인간관계는 원만했다. (모두 웃음) 고문관 아니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했을 뿐이지.

고문관은 자기가 고문관이라고 생각 안해요, 그냥 모르는 거지. (웃음)

대인관계 전~혀 문제 없었어요. 사실 조금 문제가 있기도 하지. (웃음)

감우성씨도 말쑥한 모범생 이미지 아닌가.

아직까지는 잘 속여왔다. (웃음) 나한테 큰 일탈은 고등학교를 예고로 간 거다.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중학교 졸업 무렵까지 난 예고가 뭔지도 몰랐다. 미술 선생님이 예고를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공고나 상고 얘기인 줄 알고 자존심이 상했다. 부모님한테 인문계에 못 가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거다라고 배웠으니까. 연기를 하겠다고 한 게 두 번째였는데, 그건 더더욱 부모님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가출까지 하면서 시작했다. 제멋대로 독립해서 내 판단으로 지금까지 온 거다. 그때 그렇게 내 뜻대로 가지 않았으면 진짜 재미없게 살고 있었을 것 같다. 운이 좋은 거지.

경찰차에서 도망친 만수가 철곤과 각종 금지 푯말 같은 걸 부수고 다니는 장면도 나오지만 살다 보면 된다는 것보다 안 된다는 게 더 많다. 특히 우리 사회는 권장, 지원보다 금지, 족쇄가 많다. 누군가가 그렇게 사람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만수가 푯말이나 현수막을 깨부수는 행동은 우습고 시시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걸 부수는 것은 만수에겐 가장 통쾌하고 절실했던 문제다. 안 된다는 이야기만 평생 듣고 살았기 때문에 가장 큰 일탈인 거다.

영화가 완성된 다음에야 생각난 거지만 좀더 다양한 일탈이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도 조금 있다. 예를 들면 극장에서 스크린이 돌아가고 있는데 영사기 앞으로 가서 화면에 머리 그림자를 들이민다든지, 사실 하면 안 되는 행동이지만 조용하고 진지한 자리에서 암묵적인 약속을 깨는, 유치하지만 더 재미난 모습들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점에서 어떤 선까지 지켜야 하느냐 하는 게 문제였다. 만수가 하는 행동이 누구나 한 번쯤 해보고 싶은데 법이나 규칙 때문에 못한 거를 대신 해서 재밌겠다, 시원하겠다는 느낌을 주는 정도가 좋은데 어떤 행동이 너무 심해서 이해나 공감을 무너뜨리는 것이면 곤란하다. 그래서 편의점 강도신을 가장 고민했다. 가장 재밌게 찍힌 장면인데 사실 범죄 행위이기 때문에 만수라는 인물에서 벗어나는 선이 아닌가. 다행히 철곤이 돈을 내고 장난스럽게 보이며 넘어가서 그냥 넣었다. 사실 한 번쯤은 강도짓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사람들에게는 있을 거 같고.

“극장 화면에 그림자 놀이 해볼걸”

극장 스크린에 장난을 치는 건 별거 아니지만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탈’이기도 하다. 그림자 놀이로 나비와 개를 만들면서 극장 안을 웅성웅성하게 만들고, 보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극장 관계자가 쫓아오면 막 도망가고, 그런 걸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용기가 없으니 진짜로는 못하지. 말하고 나니까 정말 더 아쉽네. (웃음)

나라면 좀더 과격한 걸 해보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생방송으로 비리 정치인이나 탈세한 거물급 인사 등이 검찰청 같은 데서 나오는 장면에 화면 안으로 휙 들어가 그 사람 얼굴에 ‘죽빵’을 날리는 그런 거. (웃음)

또 있다. 공영주차장에 주차요금 정산기계의 표 넣는 데다 막대기 같은 걸 쑤셔넣어서 고장내보고 싶다.

도로체증의 가장 큰 주범인 가변도로에 주차해놓은 차들을 쇠막대기로 쭉 긋고 간다든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나? 언젠가 영화로 표현해보고 싶은 건데 차 타고 가다 보면 진짜 재수 없는 차들 있지 않나. 아무렇지도 않게 얌체처럼 막 끼어드는 그런 차들, 보닛에다 기관총 같은 거 설치해서 도로의 꼴통 같은 그런 차들을 막 갈기는 장면 말이다. 그런데 혼자 상상하고 통쾌해하고 마는 거지 뭐. (웃음) 또 금지 팻말을 부수고 잔디밭에 들어가고 분수에 들어가고 그런 건 내가 해보고 싶어서 영화에 넣었다.

잔디밭 들어가지 말라면 안 들어가나?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있으면 들어가고 안 들어가 있으면 안 들어간다. (웃음)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해답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정도는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좀 생각할 수 있는 영화로 남았으면 하는 게 감독이기 전에 창작인으로서의 바람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화가 사람들에게 질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다른 한국 영화들과 색깔을 달리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우리 영화 한 편에 관객 몇십만 더 들고 안 들고는 감독님이나 내 인생을 길게 봤을 때 큰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고 좀더 다양한 영화와 경쟁하고 싶다.



명령과 규칙을 깨는 반항의 판타지

“견적 안 나오는” 두 사내의 예정되지 않은 일탈 속으로

한가한 국도에서도 규정 속도를 어기지 않고 차 없는 건널목에서도 신호등을 지키는 고지식한 공무원 박만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운이 패키지로 도착한다. 출근길에는 아내가 이혼 선언을 하더니 천직으로 믿고 성실하게 일해온 구청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환송회랍시고 마련된 직장 회식 자리에서 동료들은 천연덕스럽게 술값을 떠맡긴다. 참을성의 비등점에 도달한 만수는 상을 엎고 뛰쳐나와 소심한 일탈을 하기 시작하는데, 소변금지라는 팻말만 보고 저지른 노상 방뇨가 하필 파출소 담벼락이다.
만수가 경찰에게 싹싹 빌면서 공포에 떠는 동안 무전취식으로 또 다른 사내 양철곤(김수로)이 들어온다. 만수가 측은해 보인 철곤은 만수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돕는데 일이 꼬여 만수에게는 공무집행 방해라는 족쇄가 더 씌워지고,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수록 “견적 안 나오는” 범법자의 수렁에 빠져들어 간다.
영화 는 어울리지 않게 짝패가 된 두 사내가 예정되지 않은 일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그린다. 명령과 규칙에 주눅들어 사는 소시민의 처량한 현실에 대한 공감이 영화의 전반부를 끌어간다면 후반부에서는 그 명령과 규칙을 깨는 주인공들의 반항이 판타지적 쾌감을 준다. 착하고 우직하게 사는 주인공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가 끝내 도착하는 파국의 결말을 통해 자각 없는 순종이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만수가 엄한 아버지 탓에 어릴 적 박탈된 레이서의 꿈을 서울 대로변 한가운데서 이루게 되는 차 추격신은 덤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볼거리.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과 코믹한 잔재미, 액션까지 우겨넣느라 종종 이야기 전개가 튀기도 하지만 모범생과 건달 같은 기존 이미지를 적절히 끌어와 배합시킨 감우성, 김수로의 연기가 이런 단점들을 상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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